오피니언 사설

과거사의 비극이 불러온 폴란드 현대사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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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믿기 어려운 참변이다. 그제 러시아에서 발생한 비행기 추락 사고로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 등 폴란드 주요 인사를 포함한 탑승자 96명 전원이 사망했다. 졸지에 폴란드는 최고지도자를 비롯해 중앙은행 총재, 육군 참모총장, 하원 부의장, 외무차관 등 다수의 국가 엘리트를 한꺼번에 잃었다. 충격과 비탄에 빠진 폴란드 국민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며,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 등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짙은 안개로 인한 사고 위험을 무릅쓰고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한 조종사의 안전불감증 탓이 일단 커 보이지만 기체 결함이나 공항 관제탑과의 교신 이상 등 다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만큼 정확하고 철저한 사고 원인 규명이 급선무라고 본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사고조사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러시아 정부가 사태 수습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폴란드 정부는 물론이고 유럽연합(EU),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등도 조사에 참여함으로써 진상 규명에 한 점 의혹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참사가 더욱 비극적인 것은 카친스킨 대통령 일행이 폴란드와 러시아의 불행했던 과거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던 중 일어났다는 점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를 침공한 러시아는 장교, 교수, 의사, 성직자 등 폴란드 사회지도층 인사 약 2만2000명을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숲 등에서 학살하고 암매장했다. ‘카틴숲 대학살’이다. 쉬쉬하던 러시아는 70년이 지난 지금,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책임을 스탈린 개인에게 돌린 채 국가 차원의 공식 사죄와 진상 규명, 관련자 처벌을 거부하고 있다. 아물지 않은 과거사의 상처가 폴란드 현대사의 새로운 비극으로 이어진 셈이다.

독일과 러시아라는 두 세력의 완충지대에 위치한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유사한 지정학적 피해와 고통을 경험해 왔다. 이번 참사가 우리에게 더욱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은 이런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 탓도 클 것이다. 폴란드 국민이 하루빨리 슬픔을 딛고 일어나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