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사람] '사랑의 가위손' 20년 강성범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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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대구시 서구 평리동 평리네거리 인근의 서부이용소.

허름해 보이는 5평 남짓한 가게가 강성범(姜聲範·48)씨의 일터다.가게 안에는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벽에 줄줄이 걸린 표창장·상장이 그것이다.姜씨가 흘린 땀방울의 산물이다.

공적은 ‘자원봉사’.그 중에서도 바깥 나들이를 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을 방문해 이발을 해준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빗과 가위로 어려운 이웃을 어루만져온 ‘사랑의 가위손’이다.

姜씨의 ‘이발’자원봉사는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 8년간의 이발소 직원생활을 접고 이곳에 가게를 차리면서 소년·소녀가장 머리 깍아주기를 시작했다.

“당시엔 평리동도 시골 마을 같았어요.반공연맹 서구지부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소년·소녀가장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요.”

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다 머리를 깍아주기로 했다.이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 매달 15명이 姜씨 가게의 단골이 됐다.

하지만 마을에 도로가 나고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아이들도 다른 곳으로 떠났다.봉사활동도 덩달아 시들해졌다.재가(在家)장애인으로 눈을 돌린 것은 이 때.

“TV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람이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으면 남을 도울 수 있다’고 하더군요.사지가 멀쩡한 내가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이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고 했다.

장애인단체에 수소문해 가게 인근에 사는 장애인을 찾기 시작했다.

방문 날짜는 매주 쉬는 목요일 가운데 넷째주를 택했다.

85년부터 시작된 방문 이발봉사의 ‘단골’은 뇌성마비 장애인,공사장에서 일하다 건물이 무녀져 누워지내는 사람 등 나들이가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기도 쉽지 않았다.

벨을 눌렀지만 장애인이 대문을 열어줄 수 없어 사람이 올 때까지 몇시간씩 기다리거나 아예 나쁜 사람으로 오인해 “오지 말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옴쭉달싹을 못하는 장애인의 머리를 깍는 것도 고역이었다.

폭우·폭설이 쏟아질 때도 한결같이 가방을 들고 이들을 방문했다.

姜씨는 “이들이 마음을 열고 고마움을 표시할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둘째주 목요일은 평리동 자율방범 초소에서,세째주는 원대동 제일종합사회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가족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姜씨를 원망했던 가족들도 이제 열렬한 후원자가 됐다.아들 경민(17·서부고 1년)군은 자율방범 초소에 나와 쌓인 머리카락을 청소할 정도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간 사람은 줄잡아 4천여명.

“돈이 탐났다면 이 일을 못했겠지요.”

남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姜씨는 말한다.

그는 “손가락이 움직일 때까지 이 일을 할 작정”이라며 “모든 사람들이 길거리의 휴지라도 주울 수 있다면 세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자원봉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70년대 3백원이던 이발료가 9천원으로 오르는 등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그의 이웃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 강성범은…

▶1953년 경북 의성군 안평면 출생

▶ 80년∼현재 대구 서구 평리동에 ‘서부이용소’ 운영

▶ 94년∼현재 한국이용사회 서구지회 기술분과위원

▶ 96년 대구시장 표창장

▶ 97년 세계이미용올림피아드 최우수상

▶ 97년∼현재 재향군인회 서구지부 이사

▶2001년 제일종합사회복지관 ‘선한 이웃상’ 수상

홍권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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