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피치] 교훈 주는 선동열식 항명 표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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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 두시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못이루던 김응룡 감독은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감독님, 아직 안주무셨습니까. 저(선)동열입니다. "

"이 시간에 웬일이냐?"

"늦게 전화드려 죄송합니다. "

"그래, 무슨 일 있느냐?"

"아닙니다. 그런데 감독님, 저 오늘 왜 던지라고 그러셨습니까?"

"너 요즘 안 던졌으니까, 투구 리듬도 유지하고…. 감각도 살리라고 내보낸 거야. "

"…감독님, 잘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

선동열 한국야구위원회 홍보위원이 기억하는 일화 한토막. 1993년 당시 해태 선수와 감독이 나눈 전화 한 통화였다.

선동열은 프로에 입단한지 8년이 지난 고참이었고 워낙 성적이 빼어나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을 확보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김감독은 그날 팀이 6점을 리드한 상황에서 그에게 8회 마운드에 오를 것을 지시했다.

"깜짝 놀랐죠. 세이브가 주어지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때 저는 1점차 승부이거나 팀이 꼭 이길 수 있는 경기 등 중요한 순간에만 던졌어요. 그런데 세이브도 안되는 상황에서 나가 던지라니까 마음 속으로 '내가 뭘 잘못보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경기가 끝난 뒤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한 뒤 큰 맘 먹고 감독님께 전화한거죠. "

"그런데 왜 대들지 못하고 그냥 끊었죠?"

"왜 던지라고 했는지 이유를 알았으니까요. "

싱거운 대답이지만 선동열이 '국보' 라는 칭호를 들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선동열은 국내 최고수였지만 '유아독존' 과는 거리가 멀었고, 김감독은 그를 '상전 대우' 해주지 않았다.

최근 선수들의 항명이 자주 눈에 띈다.

지난 1일 현대의 퀸란은 수원 SK전에 앞서 더그아웃의 얼음박스를 방망이로 내리치는 등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김재박 감독이 오는 6일부터 벌어지는 삼성과의 대구 3연전에 가족들을 동반하겠다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데 대한 시위였다.

지난달 21일 삼성의 임창용은 투수 교체 지시에 불만을 품고 로진백을 걷어차고 글러브를 집어던지며 시위, 벌금 2백20만원을 부과받았다. SK의 에레라는 지난달 23일 수비 교체 지시를 거부하다 벌금 3백만원을 냈다.

감독의 지시에 불만을 품고 감정을 드러내는 행동은 팀 전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선동열은 "감독의 권위가 무너지면 그 팀은 끝" 이라고 말한다. 팀 워크가 생명인 단체 운동에서 선수가 감독을 불신하고 감독이 선수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면 팀이 앞으로 제대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선동열은 분명히 최고였지만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남들이 인정하게 만들어 진정한 최고가 됐다. 김응룡 감독 역시 선동열.이종범 등 내로라하는 스타들을 '튀지 않게' 관리, 해태를 한국시리즈 V9으로 이끌었다. 선동열과 김감독이 나눈 전화 한 통화의 의미는 크다. 그리고 그해 해태는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꺾고 우승했다.

이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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