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건강보험 해법 없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의료보험이 건강보험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출발한 지 1년이 됐다. 생일을 축하하고 앞날을 격려하는 것이 세상살이의 기본이지만 그러기에는 건강보험에 드리워져 있는 그늘이 만만치 않다.

건강보험이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된 건강보험의 재정고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사이인가 건강보험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진짜 위기다.

***국민 신뢰 회복이 급선무

첫째 위기는 신뢰의 위기다. 많은 국민이 건강보험의 가치에 회의를 품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오늘의 현실이다. 혜택은 별로 늘지 않으면서 부담은 커진다니, 민간보험에 가입하는 사람이 폭증한다는 최근의 언론보도가 새삼스럽지 않다.

각자 제 주머니를 차야 하는 사정이 계속된다면 건강한 사람이 힘을 모아 건강하지 않는 사람을 돕는다는 건강보험의 취지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의 뒤에는 건강보험과 건강보험의 관리자에 대한 심각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사회가 위기의 건강보험을 개혁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한 점도 그에 못지 않은 또 다른 위기다. 건강보험의 재정위기가 최근의 정부대책만으로 완전히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칫 재정위기가 만성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많은 전문가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렇다면 위기국면을 해소하기 위해서 건강보험의 구조적인 개혁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논할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이해관계가 걸린 현실 구조를 바꾸는 것을 원치 않는 총론 찬성, 각론 반대의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의 팽팽한 균형이 구조개혁의 큰 물길로 합류하지 않으면 위기구조는 온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더 큰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에 대한 답은 무엇보다 정부와 보험자의 새로운 역할에 달려 있다. 구구한 종합처방보다는 핵심에 바로 들어가 보자.

먼저 건강보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 일의 열쇠는 보험자가 쥐고 있다. 국민은 보험자인 건강보험공단을 통해 건강보험을 경험한다. 말하자면 건강보험의 최일선이자 보병이 건강보험공단이다. 따라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도 다른 조직의 몫일 리 없다.

신뢰를 회복하는 지름길은 보험자가 '행정조직' 에서 '서비스 조직' 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국민이 보험자에게 원하는 것은 단순히 보험료를 걷고 자격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건강보험은 국민 전체가 가입자이고 보험자는 국민을 대신해 일을 처리하는 조직 아닌가.

그렇다면 보험자는 당연히 국민을 대신해 불편하고 억울한 것을 해결하고 모르거나 궁금한 것에 답해야 한다. 많은 국민이 의료에 대해 충분한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고, 합리적인 건강관리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사정을 고려하면 보험자의 이러한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음은 정부의 몫이다. 정부는 회피할 수 없는 압력으로 오는 건강보험의 구조개혁에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구조개혁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이해당사자를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정부 말고 누가 대신할 수 있겠는가. 사실 여유가 별로 없다.

***구조개혁 리더십 발휘를

적어도 2, 3년 안에 건강보험의 새로운 틀, 그 단초를 놓아야 한다. 여러 제도적 변화와 새로운 정책수단들을 일관된 목표아래 제시하고 국민, 의료인과 의료기관, 의료산업, 정부와 정치권의 논의를 새로운 흐름으로 합류시켜야 하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건강보험의 구조를 새롭게 설계하는 일에 정부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문제해결을 위한 행동을 시작하기 어려운 것이 한국 사회의 역사이자 안타까운 현실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건강보험의 위기는 이미 시작됐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정부와 보험자는 새로운 역할을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와 보험자만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건강보험이 없는, 그리하여 국민의 기초적인 건강도 보장하지 못하는 '야만적' 사회로의 복귀를 원하는 것이 아닌 한 모든 당사자가 소승적 이해관계를 떨치고 위기를 넘어 새로운 건강보험의 미래를 공유해야 마땅하다.

김창엽(서울대 의대교수,의료관리학 교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