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희의 노래누리] 창작 영화음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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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으로 잠못이루던 성장기의 밤을 달래준 것은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었습니다. 최고는 KBS 라디오 '김세원의 영화음악실' 이었죠.

영화 '페드라' 의 마지막. 청년 앤서니 퍼킨스가 절벽으로 차를 몰며 "페드라! 페드라!" 를 절규할 때,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가 절망적인 오르간 연주로 깔렸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인 1962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본 적이 없었건만, 잡음섞인 LP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이 주는 강한 인상 덕에 마치 몇 번이라도 본 듯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는 어떻습니까. 암울한 미래 도시의 밤. 주룩주룩 내리는 산성비 속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조인간이 죽어갈 때 반젤리스의 음악은 참 애달펐습니다. '시프 오브 하트' 의 감칠맛은 조르지오 모르더의 음악 덕분이었으며, 바즈 루어만 감독의 젊은 '로미오와 줄리엣' 은 주제곡 '키싱 유' 로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영화음악은 영화의 보조적 역활에 그치지 않고 대중문화의 중요한 영역으로 확고히 자리잡았습니다. 많은 팝가수들의 빅히트곡은 대부분 영화 주제곡이죠.

최근 몇년 사이 한국 영화의 성장세는 놀랍습니다. 반면 그럴수록 영화음악에 대한 아쉬움도 커집니다. 관객 8백만명 돌파를 눈앞에 둔 '친구' 의 OST 판매량은 4만장 남짓. 영화의 대성공에 비하면 의아할 정도인 게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한국 영화는 창작 주제곡이 빈약합니다. 외국 가수의 기존 노래를 가져다 쓰고( '약속' '접속' '쉬리' ), 국내 가수의 옛노래를 사용하고( '공동경비구역 JSA' ), 영화주제곡은 온데간데 없고 엉뚱하게도 영화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수가 뮤직비디오에 필름을 빌려쓰는( '친구' '파이란' )상황에선 영화음악의 발전은 어렵지 않을까요.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국내 영화음악가들을 폄하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운 환경에서 분투하고 있는 그분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무엇보다 영화 제작자 여러분의 영화음악에 대한 자세가 좀 바뀌기를 바라는 이들이 많습니다. 수십억원의 제작비를 쓰면서 영화음악에는 수천만원도 아까워하고, 사실상 한달도 안되는 기간에 영화음악을 만들어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는 9월 개봉할 화제작 '무사' 의 음악은 저 유명한 애니메이션 '에반겔리온' 의 음악가인 일본인 사기스 시로가 맡았습니다. 2억원의 개런티와 충분한 제작 기간. 당연히 좋은 음악이 기대됩니다. 앞으로 한국의 영화음악가와 젊은 가수들도 그런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한국 영화와 가요, 그리고 한국 영화음악 모두 한단계 도약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최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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