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남북협력기금 맘대로 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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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누가 협력기금을 지원한다고 했습니까. 현재까지 아무 것도 결정된 바 없어요. " 현대와 북한간의 '금강산 관광 정상화' 합의사실이 전해진 11일, 주무부처인 통일부 실무자들은 항의전화를 받느라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정경분리 원칙을 내세우던 정부가 왜 난파 위기에 몰린 민간사업에 국민세금을 쏟아부으려 하느냐" 는 지적이 많았다고 한다.

정부는 현재 이 문제를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간 당국자들이 쏟아낸 말을 짚어보면 이미 협력기금 사용 쪽으로 방침을 세운 듯하다.

북.현대간 협상이 한창이던 지난주 한 당국자는 "북한이 육로(陸路)관광을 수용하면 6백억원 가량 들어갈 도로연결 비용을 협력기금에서 부담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합의 직후 또 다른 당국자는 "먼저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고 금융권의 현대에 대한 융자 등을 지켜본 뒤 여의치 않으면 협력기금을 검토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업.은행이 돈을 쏟아부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게 현실이기 때문에 이런 발언은 정부가 나서기 위한 명분 쌓기라는 생각이 든다.

정부는 1990년 남북협력기금법 제정 이후 경수로 발전소 공사나 대북지원에 모두 1조1천2백20억원의 협력기금을 썼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회동의 절차를 밟는 등 국민의 뜻을 물어본 적은 없다. 지난해 9월 발표된 50만t의 대북 식량차관(1천8억원 상당)지원도 정부가 어느 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또 경의선(京義線)복원공사에 올해도 1천6백58억원의 협력기금을 배정해 이미 3백22억원이 지출됐지만 공사는 중단된 상태다. 물론 금강산 사업은 첨예한 대치상태의 남북관계 개선에 돌파구를 마련한 남북화해의 상징이라는 측면이 있다.

때문에 이 사업이 지속됐으면 하는 것은 기자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전체 국민의 의사와는 아랑곳없는 듯한 태도로 협력기금이 집행돼서는 곤란하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다. 차라리 정부가 이 기금 사용의 필요성을 자신있게 설명하고, 국민과 야당의 협조를 구했으면 한다. 협력기금은 국민의 세금이기 때문이다.

이영종 통일외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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