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리뷰] '부숭이는 힘이 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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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조직폭력배들뿐 아니라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힘' 은 엄연한 서열 기준이다. 골목대장이 되려면 일단 힘부터 세야 하는 법이니까.

작가 박완서씨가 모처럼 내놓은 장편 동화 『부숭이는 힘이 세다』는 바로 그런 모티브에서 출발한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서울 누리네 집은 시골에 사는 고모할머니와 그 외손자인 부숭이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소란스러워진다.

동갑내기인 부숭이에게 누리는 '손님 대접' 을 하려 애쓰지만 반응이 영 껄끄럽다.

그러다 누리가 부숭이의 헌가방을 내다버리는 '사건' 이 벌어진다. 알고보니 그 가방은 부숭이 어머니가 죽기 전에 병석에서 손수 재봉틀을 돌려 만들어준 것. 화가 난 부숭이와의 몸싸움에서 반에서 제일 힘이 세다고 알려진 누리는 뜻밖에 지고 만다.

자신보다 몸집도 훨씬 작은 시골아이에게 진 이유가 '땅힘' 때문이라는 고모할머니의 말에 솔깃한 누리. 그 정체를 찾아 시골로 고모할머니를 따라 나선다.

박완서씨의 글에선 항상 따스한 체온이 느껴진다. 특히 이 동화엔 할머니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푸근한 사랑까지 담겼다.

실제로 그가 손자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 중에 제일 재미있어 했던 것을 손질한 글이란다. 원래 1990년대 초 『부숭이의 땅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던 것인데, 원고량을 줄이고 생소한 우리말들을 바꾸는 등 새롭게 가다듬어 내놓았다.

손자에게 자연.생명,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주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강했던 탓인지 글 후반부에서 생동감이 다소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엄마가 오히려 '쩔쩔 매며' 컴퓨터를 사주게 만들 만큼 눈치가 빠른 듯하면서도 '땅힘' 얘기를 금세 믿을 정도로 순진한 구석이 있는 누리라던가, 누리에게 매사 삐딱하게 굴며 '시골 아이의 자존심' 을 지키려는 부숭이 등 '살아 있는' 등장인물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능청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정곡을 찌르는가 하면 강과 들, 그리고 산으로 누리를 데리고 다니며 자연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는 고모할머니의 모습은 작가의 분신인 듯 느껴진다. 고모할머니를 통해 작가는 누리, 아니 우리 모두에게 말한다.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그 가방은 부숭이에게 돈의 가치로는 계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음을, 부숭이가 누리를 이긴 건 "땅힘이 아니라 사랑의 힘" 이었음을 - .

장면 장면의 분위기에 쏙 맞는 아름다운 삽화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행복감을 더해준다.

최근 『아름다운 수탉』에서 동양화풍 수채화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던 김세현씨가 이 작품에서도 표정 하나하나 살아 있는 완성도 높은 그림들을 선보인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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