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고무 자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오로지 종족 보존을 위해 짝짓기를 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생식 이외의 목적, 즉 쾌락을 위해 섹스를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 때문에 원치 않는 임신의 공포로부터 해방된 섹스는 인류의 오랜 숙원 가운데 하나였다.

이를 위해 인간이 고안한 물건 가운데 가장 전통있는 것이 콘돔이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콘돔은 영국 버밍엄 근처의 더들리성에서 발견된 것으로, 1640년께 동물의 내장으로 만들었다. '콘돔' 이란 이름은 당시 찰스 2세의 주치의였던 콘돔 박사가 이를 만들어 그렇게 됐다는 설과 라틴어의 'condon(그릇)' 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미 3천년 전 고대 이집트인들이 린넨으로 만든 콘돔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로마시대에는 군인들이 풍토병을 예방하기 위해 양의 내장 말린 것을 이용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비단을, 일본에서는 가죽이나 거북 껍질을 콘돔으로 사용했다.

고무제품은 1844년 찰스 굿이어가 가황고무 특허를 얻으면서 대량 생산됐다. 지금의 라텍스 제품은 1921년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고무공장 직원이던 앨프리드 트로전이란 사나이가 뜨거운 가황고무통에 자신의 '물건' 을 담그는 사고를 당하면서 개발했다.

콘돔은 값이 싸고 휴대와 이용이 간편한데다 부작용이 없어 가장 훌륭한 피임기구로 꼽히고 있다. 게다가 에이즈 등 각종 성병 예방에 효과가 뛰어나 전세계 보건당국이 콘돔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은밀한 쓰임새 때문에 '콘돔' 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가 거북하다. 우리는 그저 '고무' 나 '텍스' 로 부르는데, 영어로는 무려 5백여가지의 별칭이 있다. 이중엔 '브룩 실즈' 'ABC(안티 베이비 콘돔)' 같은 재미있는 이름도 있다. 외국말을 우리말로 바꾸는 데 일가견이 있는 북한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부르는지 궁금해 베를린의 북한대사관에 문의했더니 한 여성직원이 '고무자꾸' 라고도 한다며 부끄러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 '고무' 에다 독일어의 '자크' (Sack.주머니)를 합친 말 같다.

이처럼 요긴하지만 대놓고 말하기가 어색한 콘돔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커밍아웃을 했다. 경북대가 치열한 논쟁을 거쳐 5일 교내에 콘돔 자판기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고 한다. 마침 이날은 에이즈 발견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학교측의 전향적이며 시의적절한 결정과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여학생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