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꿀 ‘미리 쓰는 유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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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호 34면

올해 3월 11일은 필자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날로 남을 것이다. 그날 우리 회사는 임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출연한 자본금으로 ‘따뜻한 동행’이라는 사회복지법인을 출범시켰다. 14년 동안 꿈꿔왔던 구성원들의 염원이 결실을 본 순간이었다. 우리 회사는 창립 이후 매월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해 왔는데, 이번에 장애인 시설 개선, 장애인 자립 지원 등에 초점을 맞추어 보다 특화되고, 체계적인 봉사활동을 추진하려 복지법인을 설립한 것이다. 대개의 복지법인은 특정 기업이나 개인이 자본금을 출연해 설립된다.

하지만 ‘따뜻한 동행’은 우리 회사의 모든 임직원이 월급에서 1%씩 갹출해 적립한 기금과 십시일반으로 모은 성금 21억원으로 설립됐다. 또한 다른 기업이나 단체와 공동으로 사회 공헌을 할 수 있도록 개방형으로 운영된다는 게 남다르다.

같은 날, 우리는 깊은 슬픔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종교와 종파를 떠나 우리 시대의 위대한 스승이셨던 법정 스님께서 열반하셨기 때문이다.

필자는 15년 전 전통 건축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법정 스님을 뵈러 불일암에 간 적이 있었다. 마침 스님께서 출타 중이라 아쉽게도 거처만 살펴보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당시엔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그분의 저서를 통해 글 하나하나가 주는 단아함과 깊이 있는 문장에 매료되기도 했고, 나아가서는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복지법인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알게 모르게 큰 힘이 됐다. 그래서 스님의 입적은 더더욱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법정 스님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도 귀감이 되셨던 분이다. 스님께서는 1971년 한창 젊은 나이에 미리 유서(遺書)를 쓰셨고, 그에 따라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사셨다. 미리 유서를 쓰면 스스로 걸어온 족적을 항상 반추하게 되고, 이를 반복하면서 삶의 깊이를 한층 더할 수 있다고 한다. 필자도 몇 년 전부터 미리 유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바쁜 일상을 핑계로 아직껏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접한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은 필자의 생각을 다시금 가다듬는 계기가 됐다. 물론 미리 쓰는 유서에 담을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고민과 사색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는 이미 마음속으로 굳게 정한 바가 있다. 먼저 사후에 장기는 기증을 하고 싶다. 내 몸의 일부가 다른 이들의 소중한 생명을 지키거나 더욱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데 보탬이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건강관리에 더 신경을 써야 할 듯하다. 그리고 매장보다는 화장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환경 문제가 없음을 전제로 화장을 한 다음 강물에 뿌린다면 자연에서 나온 온몸이 다시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 아니겠는가?

회사의 후계 문제는 지난해 초에 이미 최고운영책임자를 선임해 경영권 승계 절차를 밟고 있기 때문에 따로 유언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재산 문제는 다소 민감한 사안이라 많은 생각과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유서의 말미는 이해인님의 ‘미리 쓰는 유서’라는 시구(詩句)의 마지막 구절처럼 나도 “그동안 받은 사랑 진정 고마웠습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하고 싶다.

『20, 30대가 준비해야 할 인생설계』라는 책에서는 ‘미리 유서를 쓰는 것’을 젊은 시절의 인생 설계에 꼭 필요한 항목 중 하나로 꼽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죽음이 곧 삶의 완성’이라는 말에 공감한다면, 미리 유서를 써서 자신의 삶이 완성되는 순간의 자아를 묘사해 보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을 것이다. 미리 쓰는 유서야말로 죽음이라는 숙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눈을 감는 순간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 안타까움을 최소화하려는 의지의 발로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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