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172. "루스여, 편히 잠들라 … 아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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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스포츠 경기에 대한 격문과 헤드라인. 격문은 관중이 큰 종이 등에 자기 뜻을 담은 글, 헤드라인은 신문을 비롯한 미디어가 한 줄로 그 경기의 의미를 함축한 글이다. 불멸의 경기에는 불멸의 격문이 따르고, 감동적이거나 기발한 헤드라인을 남긴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2004 월드시리즈. 그 격전을 빛낸 격문과 헤드라인 중 수작을 골랐다.

◆ 격문 베스트

⑤86 years swept away-"86년이 씻겨 가버렸다."

월드시리즈 4차전 때 보스턴 레드삭스 팬이 들고 나왔다. 4연승으로 우승을 '싹쓸이(sweep)' 하겠다는 의지와 지난 86년 동안의 나쁜 기억들이 모두 '씻은 듯 사라졌다(swept)'는 의미를 동시에 잘 표현했다.

④Deal the Cards losing hand-"카디널스에 지는 패를 돌려라."

한 레드삭스 팬이 1차전 때 들고 나왔다. 상대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줄여 'Cards'라고 부르는 데 착안, 카드게임과 연결했다.

③Keep the faith-"신념을 잃지 마라."

3패로 뒤진 양키스와의 챔피언십시리즈 4차전 때 펜웨이파크 곳곳에 나붙었던 글. 그날 역전승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오티스가 인터뷰에서 이 말을 다시 꺼냈다. 믿음으로 뭉친 레드삭스는 3패 뒤 기어이 4연승 드라마를 연출했다.

②From cursed to First-"커스드(저주받은)에서 퍼스트(정상)로."

발음의 연결이 좋다. 저주에 시달린 세월의 아픔과 최고에 오르는 감격을 대구로 연결했다.

①Rest in peace, Babe- "루스여, 평안히 잠들라."

최우수작. 레드삭스가 이길 것이고, 그래서 저주가 끝날 테니 루스의 영혼이여 이제 방황을 접고 편안히 쉬라는 의미.

◆ 우승 이튿날 헤드라인 베스트

③Ruthless Redsox!(댈러스 모닝뉴스)

그냥 보면 레드삭스가 카디널스를 '무자비하게'꺾었다는 말. 그런데 자세히 보면 베이브 루스의 성(姓)과 '없다'라는 의미의 접미사 less의 합성어다. "(더 이상)레드삭스에 루스의 저주는 없다!"

②See you in 2090!(뉴욕 데일리뉴스)

레드삭스의 라이벌 뉴욕 양키스의 본거지 신문으로 적당히 오만하고 냉소적이다. 감격하는 레드삭스 선수들의 사진 위에 "2090년에 만나요"라고 썼다. 그리고 "저주가 없는 해에 레드삭스가 카디널스를 꺾었다"고 부제를 달았다. 그들이 저주를 푼 게 아니라 86년 만에 저주가 없는 해를 맞아 우승했으니 다시 86년 뒤인 2090년에나 우승해 보라고?

①Amen!(보스턴 헤럴드)

86년간 염원해온 우승. 이제 그 간절한 기도에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다. 그 마지막 문장으로 선택하기에 아주 적절했던, 그리고 가장 함축적인 한마디였다. <텍사스에서>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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