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스테이지] 보이스 트레이너 서상권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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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사람의 소리는 천차만별입니다. 이런 여러 음성들을 이용해 무대에서 다양한 인물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도 우리나라 배우들은 획일적인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습니다. "

국내 유일의 '보이스 트레이너' 인 서상권씨(44.사진). 그의 직업은 말 그대로 배우들의 발성과 발음을 지도하는 일. 영국의 로열 셰익스피어컴퍼니 등 세계 유수의 극단에선 전문지도자를 통한 배우들의 발성훈련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하지만 국내 대다수 극단에서는 연출가나 선배 연기자들이 그때그때 발성을 지도하는 열악한 실정이다.

" '발성' 하면 성악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요. 심지어는 연극영화과의 발성과목을 성악과 교수가 지도하는 학교도 있습니다. " 관객에게 대사를 전달해야 하는 연극이야말로 그 어떤 장르보다 발성과 딕션(발음)이 중요하다는 게 서씨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추상적.미학적 개념만으로 '발성이 좋지 않다' 고 가르쳐온 기존의 발성.화술 지도방식을 버리고, 구체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한다.

"아무리 발성이 안좋다고 감정을 실어서 소리를 내라고 한들 하루아침에 잘 할 수 있겠어요? '네 몸의 어느 부분을 써라' '그 대사에서는 이런 제스처를 취해보라' '어느 어느 단어에 악센트를 넣어보라' 는 등의 구체적인 지적을 해주어야죠. " 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리와 몸의 관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런 지론은 짧지 않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서울대 성악과 77학번인 그는 학교를 졸업할 무렵, 연주자로 나서기에는 자신의 소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심한 자괴감에 빠져 들면서 성악가의 길은 멀어졌다.

합창단원.중학교 교사.오페라 조연출.오케스트라 기획업무 등 다양한 직장을 전전했지만 소리가 망가진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서씨가 그 해답을 찾은 곳은 무대다. 93년 뮤지컬 전문기획사인 에이콤의 창단멤버로 입단, 연기와 무용으로 구슬땀을 흘리면서 몸이 무감각해지고 늘어져 있기 때문에 소리가 막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몸의 골격과 근육 등이 소리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배우훈련서는 물론이고, 발음.화법책.국어책들을 모두 섭렵했다. 에이콤의 뮤지컬 '명성황후' 초연 당시 배우들의 발성을 지도하기도 했다.

뮤지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연출가 이윤택씨 밑에서 연희단거리패와도 작업했다. 말을 전달하고 뽑아내는 발성을 중시하는 바닥에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식 보이스 트레이너로 참여한 작품이 96년 공연된 살롱뮤지컬 '오피스걸' 이다. 최근에는 지난 2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가족 오페라 '마술피리' 에 참여했다. "한국어 딕션에 약한 성악가들을 지도하느라 애를 먹었다" 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함께 참여한 뮤지컬 배우들은 그래도 대사 전달을 해야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래할 때도 음색이나 음정보다는 발음에 힘을 싣지만 오페라가수들은 음정에 신경을 쓰다보니 딕션은 뒷전이기 일쑤지요. "

일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서씨는 99년과 2000년 두차례 보이스 트레이닝 워크숍도 열었다. 배우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입소문' 을 타면서 99년부터 용인대와 의정부 경민대에서 신체발성과 화술 강의를 맡고 있다.

"좋은 소리는 좋은 발음에서 나옵니다. 그건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것이 아니지요. " 서씨는 체계적인 배우양성을 위해서는 연극협회나 국립극장 등에서 연구기관을 세우는 식의 제도적 지원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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