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선우 '봄날 오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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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늙은네들만 모여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ㆍ그ㆍ러ㆍ바ㆍ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 놓은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 김선우(1970~ )의 '봄날 오후' 중

두 개의 그림이 겹쳐진다. 늙은 '할마시' 들이 젊은 척하려고 분을 바르다가 떠들면서 내숭떠는 그림과, 젊은 화자가 공중변소에서 늙은 척하면서, 그러나 그 젊음의 무게 때문에 클클 웃는 그림.

오후의 정적이 감도는 공원을 이렇게 유쾌하게 그려낼 수 있는 시인의 힘이 느껴진다. 안일한 감상주의와 자아분열적 글쓰기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그녀의 시가, 당당하게 윤기를 발하고 있다.

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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