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일기] 미국식 대화잣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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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외교통상부.통일부 등 외교안보 부처들은 11일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의 방한 결과가 한반도 정세에 미칠 영향분석에 여념이 없었다. 통일부 등 일부 당국자들은 우리의 대북 포용정책 지지를 재확인한 것 등 성공적인 대목이 많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아미티지 부장관이 우리 정부가 그토록 원하던 북.미대화의 재개를 공개적으로 확약한 것만 갖고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 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정부 일각에서는 "쉽지 않은 한반도 여정(旅程)이 시작됐다" 며 바짝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 당국자는 "미사일 방어(MD)추진 등 부시 미 행정부의 세계전략이 점차 구체화해 가고 있다는 감을 절실히 느꼈다" 면서 " '화해' 쪽이든, '긴장' 쪽이든 한반도에는 머지않아 격랑이 일 것" 이라고 말했다.

다른 당국자도 "대북 포용정책 지지, 제네바 합의의 유지 등은 미국이 늘상 해오던 얘기를 다시한번 한 것" 이라며 "그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미국식 대화잣대' " 라고 말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당근' 에 보다 무게를 두고 북한과 대화를 했다면, 부시 행정부는 '채찍' 을 훨씬 강조하고 있다는 냄새가 이번 아미티지 방한을 통해 물씬 풍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신(新)외교안보전략인 '전략적 틀' 에 선제공격까지 포함된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 개념이 들어 있는 게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지스함의 동해 앞바다 배치 움직임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미국의 이같은 입장을 감안할 때 북한이 과거의 행태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벼랑끝 전술' 의 대화방식을 고집할 경우 사태가 어디까지 번질지 우려된다. 부시 대통령이 대북정책에서 클린턴 정부가 세운 기조는 일정부분 유지한다 해도 그 접근방식만은 달리 하리라는 것은 점점 명약관화(明若觀火)해진다.

'믿지만 확인하라' '단호해야 하며 환상을 갖지 마라' 는 원칙에서 접근하리라는 얘기다.

우리 정부가 북.미대화 재개를 낙관만 하면 안되고, 보다 정교한 대미.대북 외교의 틀을 만들어야 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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