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하얗게 된 ‘머리 올리던 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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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호 16면

새벽 5시.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오늘은 이 남자가 머리를 올리는 날. 골프장에 처음 나간다는 생각에 남자는 밤잠까지 설친 터였다. 승용차에 골프 가방과 옷 가방을 싣고 골프장으로 출발-. 전날 골프 선배들이 일러준 말이 떠오른다.

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103>

“너, 그거 아냐. A는 머리 올리던 날, ‘7번 아이언과 퍼터만 있으면 된다’는 말만 믿고 진짜 7번 아이언과 퍼터, 달랑 2개만 들고 골프장에 나왔다더라. 설마 너도 그러진 않겠지.”

촌스럽게 그런 실수를 하다니, 나는 그런 우를 범하지 말아야지. 남자는 보기 좋게 골프장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간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보무도 당당하게 클럽 하우스를 향해 걷는다. 약속시간보다 30분 전에 도착했으니 지각할 염려는 없으렷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남자는 골프장에 어떻게 입장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것이다. 클럽 하우스까지는 당당히 걸어들어갔지만 어떻게 옷을 갈아입고, 어떻게 골프백을 내려야 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남자는 주위의 눈치를 살핀다. 그제야 남자는 동물적 감각으로 현관 앞에 차를 대면 골프백을 내려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A는 차로 돌아가서 트렁크를 연 뒤 골프백을 낑낑 메고 클럽 하우스로 돌아온다. 남자는 어떻게 접수를 하고, 어떻게 옷을 갈아입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화장실에서 큰일을 치른 뒤 양변기 위에 알토란 같은 골프공 한 박스를 놓고 나온 것과 식당에 두고 온 모자를 찾기 위해 부랴부랴 발걸음을 되돌렸던 것만은 분명하다. 1번 홀 티샷을 앞두고는 공을 올려놓을 티펙을 찾아 다시 허둥지둥했던 기억도 난다.

남자는 그제야 깨닫는다. 골프를 ‘즐기려면’ 생각보다 많은 준비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런데 1번 홀부터 캐디의 불호령이 떨어지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빨리 뛰지 않고 뭐 해요. 빨리 뛰어다니세욧!”

남자는 존댓말이 반말보다 더 모욕감을 줄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캐디는 필시 아무런 악의가 없었을 터였다. 그저 또 한 명의 비기너에게 골프 매너가 뭔지 제대로 가르치고 싶었을 것이다. 남자는 마치 가을철 메뚜기처럼 필드 위를 잘도 뛰어다닌다. 페어웨이는 물론이고 산과 물을 헤집고 다닌다. 싸늘한 말투에다 간간이 야릇한 미소까지 흘리는 캐디는 군 시절, 유격 훈련장의 조교를 빼닮았다. 남자는 울고 싶어진다. 캐디 언니가 무섭기 때문만은 아니다. 골프를 배운 지 무려 4개월, 그동안 투자한 돈과 시간이 얼마인데 이토록 ‘뽈’이 안 맞느냔 말이다. 좋다는 교습서와 DVD는 죄다 사다가 골프 이론까지 체계적으로 익혔는데도 머릿속은 그저 새하얄 뿐이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공은 이른 아침 안개 속에 오른쪽, 왼쪽으로 춤을 춘다. 18홀을 완주한 남자는 골프가 마라톤만큼이나 힘든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클럽 하우스에서 샤워를 마친 남자는 골프를 할 때 또 하나의 준비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다. 러닝 셔츠와 팬티. 남자는 잠시 갈등에 빠진다. 러닝 셔츠와 팬티를 벗은 채로 겉옷을 입을 것인가, 아니면 땀에 젖은 속옷을 재활용할 것인가. 남자는 러닝 셔츠는 입지 않고 땀에 젖은 팬티만 다시 입기로 한다. 그래서 남자는 생각한다. 골프는 땀에 젖은 팬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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