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 윤호진씨가 읽은 '시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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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업(業)이 연극인지라 희곡을 원래 좋아했지만, 요즘엔 희곡의 참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 안타깝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의 작품들을 무척 좋아하는데, 셰익스피어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종종 입버릇처럼 나는 얘기를 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체홉 찬양가임에도 불구하고 청년 시절 나의 밤잠 못 이루게 했던 감동적인 책은 다름 아닌 아서 밀러의 희곡 『시련』(평민사)이다. 유신치하 시절 읽었던 이 책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 맞물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나는 이 작품을 공연하려고 했었고 계엄령이 선포되는 바람에, 또 계엄령 해제 이후에는 소재 문제로 안기부가 제재를 가하는 바람에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이 작품은 매카시즘에 관계된 문제를 다룬 희곡인데, 미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집단적으로 분류해 내는 과정에서, 작가인 아서 밀러가 사회주의자로 몰리면서 겪었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밤을 꼬박 새며 읽고 난 뒤 나는 그 충격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 이 작품을 한국에서 올려보지는 못했지만 그 감동은 신앙처럼 내 머리에 남아있다.

제목처럼 '시련' 이 젊은 시절 겪음직한 책이라고 한다면, 늙어서인지, 요즘에는 동양 철학과 정서에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는다. 몇 년 전 읽었던 최인호의 소설 『몽유도원도』(청아출판사)는 지극히 동양적 사고가 갖는 아름다움과 포용력을 발견한 작품이다.

작품의 핵은, 외모가 추해졌을 때도 사라지지 않고 더욱 극대화되는 인간남녀의 사랑이다. 요즘 읽고 있는 『노자와 21세기』(통나무)는 바로 이 정서를 철학으로 논한 책인데 바로 그 말이 나온다.

'매우 아름다운 이름은 크게 추한 것에서 생겨난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결국 같은 것이라는 말이 곧 이것을 의미한다. ' 중국어 촬영과 영어자막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 '와호장룡' 처럼 지금 서양에는 동양 바람이 불고 있다.

두부 자르듯이 정확하게 세분화하고야 마는 논리의 정서가 서양철학이라고 한다면, 넓게 보고 물 흐르듯 포용하는 동양철학은 이제 그 막대한 영향력을 보여줄 시기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억지로 강해지려고 하면 바로 그 강함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윤호진 <연극연출가.극단 에이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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