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자율 가장한 타율, 신문고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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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신문고시(告示)가 숱한 문제점을 안은 채 2년6개월 만에 부활했다. 지난 13일 규제개혁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한 고시안은 이전보다 훨씬 강하고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초안에 비해 일부 독소조항이 완화.삭제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이나 형식, 그리고 추진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의도 등을 감안할 때 한국언론사에 기록될 또하나의 나쁜 선례를 남겼다.

시장경제와 규제완화 원칙, 그리고 언론자유 침해 지적까지 무시하면서 '언론 길들이기' 에 나선 정부의 행태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이번 고시가 겉으로는 신문협회의 자율규약과 자율시정을 우선시한다고 돼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명백하게 '자율을 가장한 강제개입' 이라고 본다. 자율과 개입의 기준이 극히 모호할 뿐 아니라 독소조항들이 숨겨져 있어 공정위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신문경영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시에는 '신문업계의 자율규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공정위가 나선다' 고 돼 있다. 하지만 질서가 정착됐는지 안 됐는지의 판단은 공정위가 아무런 기준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돼 있어 '자율' 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고시는 또 '독과점 지위 신문사가 판매가.광고료를 원가변동 요인에 비해 현저하게 높은 수준으로 유지.변경하면 규제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신문은 지적재산권으로 제품에 따라 질(質)이 천차만별이다.

그런데도 단지 '신문' 이란 품목이 같다는 이유로 값을 정부가 일률적으로 평가하겠다는 것은, 미술품의 '호당 단가' 를 일원화하겠다는 발상과 다를 바 없다. 외국에서 권위지는 부수가 대중지보다 적어도 구독료.광고료는 훨씬 비싼 경우가 허다하지만 정부가 이를 규제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아울러 '독과점 사업자' 를 어떻게 규정할지 그 기준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법에는 한개 사업자의 시장점유율이 50% 또는 세개 사업자가 75%를 넘으면 '시장지배적 사업자' 로 규정해 정부가 가격변동 등에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신문.잡지발행부수공사기구(ABC)가입도 보편화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시장지배적 사업자인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기준 자체가 불분명하면 권력의 개입소지는 커지는 법이다. 신문업계가 강력히 반대하는 공동판매 역시 모호한 '본사-지국간 불공정 거래' 에 대한 규제를 통해 얼마든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밖에 '고시에 포함되지 않은 사항은 공정거래법과 시행령에 따라 제재를 가할 수 있다' 는 조항을 굳이 부칙에 넣은 것도 신문사의 경영 전반에 대한 개입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수차 지적했듯 우리가 고시에 반대한 것은 이 조치의 목적이 권력의 언론 개입에 있음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힘과 권력을 가진 정치권과 정부가 언론의 건전한 비판의 소리를 싫어하는 차원을 넘어 없어도 될 제도를 무리하게 만들어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는 극히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공정위는 고시부활이 정말 '정치적' 인 목적과 정해진 언론탄압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무리수를 두지 말고 신문에 대한 규제를 앞으로 신문협회가 만들 구체적인 '자율규약' 과 자율감시에 맡겨야 한다. 신문의 자율개혁과 자율규약 실천에도 불구하고 공정위를 앞세운 권력이 개입할 경우 권력과 언론간에 중대한 사태가 발생할 것임을 미리 경고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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