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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빌린 '진실과 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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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어떤 형태든 과거사 청산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반인륜적 범죄가 자행됐던 음습한 과거를 들춰내는 데 가해자들이 순순히 입을 열길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래서 거론되는 게 '만델라식 해법'이다. 미 평화연구소에 따르면 과거사 규명 위원회를 설치했거나 운영 중인 나라는 아르헨티나.칠레 등 25개국이다. 이 중 대표적 성공 사례가 1995년 남아공에 설치됐던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다.

열린우리당이 지난 21일 민간인 학살 등을 규명하기 위해 제출한 법안은'진실규명과 화해를 위한 기본법'으로 '진실화해위원회'설치를 규정하고 있다. 남아공 모델을 좇겠다는 뜻 같다.

TRC는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작품이다. 그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주교를 위원장으로 임명, 백인정권에서 저질러졌던'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의 추악한 진상을 파헤치게 했다. 이때 TRC는 만델라식 해법을 택한다. 요체는 만천하에 공개된 청문회에서 진실을 고백하면 면죄부를 준다는 것이다. 정치적 범죄에 한한다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응징보다 진상규명과 화해에 무게를 둔 방안이다. 심지어 남아공은 94년 임시헌법에 "화해를 위해, 정치적 동기로 자행된 과거의 범죄는 사면한다"는 명문조항을 넣기도 했다.

여기엔 만델라 특유의 관용이 작용했다. 그는 27년간 로벤섬의 싸늘한 철창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자신을 20여년간 감시했던 백인간수를 94년의 역사적인 의회 개원식과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했다.

그러나 만델라식이 채택된 데는 더 큰 이유가 있다. 진실을 제대로 밝히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그가 굳게 믿었던 것이다. 물론 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가 심하게 반발했다. "반인륜적 범죄의 사면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럼에도 TRC는 만델라식 해법을 밀어붙여 놀랄 만한 성과를 낸다. 사면을 노린 죄인들이 다투어 청문회장에 걸어나왔다. 가장 극적인 것은 경찰 내 비밀암살단 단장 유진 드코크의 청문회였다. 6건의 살인을 포함, 89건의 범죄가 인정돼 중형을 선고받게 된 그는 감형을 노리고 자신과 동료의 죄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반체제 인사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불 태운 뒤 뼛조각까지 없애버린 죄상을 증언했다.

TRC는 98년 최종보고서에서 "사면을 노린 많은 범인들의 폭로 덕에 추악한 비밀들을 캘 수 있었다"고 밝혔다. "과거의 잘못을 용서(Forgive)는 해도 잊지(Forget) 않기 위해선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는 만델라의 신념이 실현된 것이다. TRC는 2만1000여명의 피해자들을 조사, 비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5900여명을 처벌하는 개가를 올렸다. 정치적 범죄자 1160명은 약속대로 사면했다.

열린우리당의 과거사 규명 법안을 살펴보자. "가해자가 진실을 밝히면 처벌면제를 건의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긴 하다. 그러나 남아공처럼 정치적 범죄로 인정되면 사면을 보장한다는 식의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인권침해 시비가 일 정도로 조사권한도 강화돼 있다. 진실규명보다는 응징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인상이다.

범죄에 대한 추상같은 응징은 한 사회가 추구해야 할 원칙임에 틀림없다. 남아공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왜 만델라식 해법을 택했는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기록문화의 후진국이다. 게다가 조사의 대상은 반세기 전 은밀히 행해졌다. 그 진상을 가해자들의 고백 없이 밝혀내기란 불가능하다. 남아공을 전범으로 삼겠다면 이름만 따올 일이 아니다. 배워야 할 건 화해의 정신과 진실 규명을 위한 슬기다.

남정호 국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