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시인과 재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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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름방학을 맞아 학생들이 비운 바닷가 작은 학교에 시인들이 모인다. 오로지 시심(詩心)만 갖고 모여든 시인과 시인 지망생 3백여명이 교실 마루에서 3박4일간 가난하게 숙식하며 시를 배우고 짓는 해변시인학교에 70대의 건장한 노인이 찾아들었다. 여느 시인과 다름없이 하얀 반팔 티셔츠 유니폼을 입은 그 노인은 시인들 앞에서 노래 한곡을 불렀다.

온몸으로 "이거야 정말 만나봐야겠네" 라며 열창하던 그 노인. 시인들과 함께 맨 마루에 빙 둘러앉아 안부를 묻고 시와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노인은 정주영(鄭周永)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

해변시인학교를 곧잘 찾아 시인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던 그는 그 얼마후 정말 온몸으로 민족의 대서사시를 썼다. 소떼를 몰고 남북 분단의 벽을 넘던 그 기발한 발상의 뭉클한 감동을 어느 수백, 수천행의 서사시가 맞설 수 있겠는가.

"어릴 적 가난이 싫어 소 판 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한 적이 있다. 이제 그 한마리가 천마리의 소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 며 소떼와 함께 했던 말. 그리고 25일 영결식장에서 마지막으로 들려줬던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는 육성은 바로 그런 시심의 발로다.

집 떠나 갖은 난관과의 투쟁 끝에 결국 승리해 금의환향하는 것이 영웅 서사시의 골격이요, 상식에 갇힌 인간 한계를 넘어 무한 자유의 지평을 열려는 마음이 시심 아닌가. 굳은 관습이나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파격적이고 과감한 발상이나 행동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해 가치를 창출해내는 기업가 정신은 바로 시인의 그것이다.

"각자가 자기 하고 싶은 욕망을 성취했다면 그 사람은 (富)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 사회에서 각자가 뜻하는 바의 욕망, 즉 재물이면 재물, 학식이면 학식, 기술이면 기술, 예능이면 예능 등 갖가지 부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고 鄭전명예회장은 한 강연회에서 밝힌 적이 있다. 물질 한가지 만으로 부자다, 가난하다를 따지며 황금 만능주의로 빠져드는 사회에 대한 경고로 들릴 수 있는 말이다.

좋은 시 한편을 얻으면 천하의 어떤 보배를 얻은 것보다 흡족한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돈이 아니라 정신과 문화적인 가치에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십분 인정하고 지원할 수 있는 사회가 아쉽다.

이경철 문화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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