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도로(徒勞)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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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94년 북한 핵 위기에서부터 김일성 사망까지 북한 권력 핵심들의 움직임을 소설화한 북한의 정치소설『영생』이 있다. 김일성.김정일은 실명(實名)으로, 나머지 인물은 가명으로 등장하지만 대개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여서 비록 소설이지만 북한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다.

***거짓 보고를 믿는 지도자

북한의 소설이라는 것이 김일성 부자의 신격화가 목적이기 때문에 여기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민족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애쓰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김일성은 눈병이 났는데 시간을 낼 수 없어 입원하지 못하고, 김정일 역시 매일 밤 늦도록 서류를 보고 나라 일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항상 수면이 부족해 눈이 충혈돼 있다. 이 충혈된 눈을 아버지가 보면 걱정하실까봐 아버지를 만날 때면 늘 색안경을 낀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이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멍가게를 맡아도 열심히 하게 돼 있는데 항차 나라 살림을 맡으면서 열심히 하지 않을 지도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 죽기살기로 일을 한다. 북한 지도자들이 이렇게 밤잠을 못 자며 눈병이 나도록 일을 하는데 북한 주민은 왜 굶주리는 것일까. 무엇이 잘못돼서일까. 단순히 연이은 홍수로 인한 재해 때문일까.

2년 전 금강산 관광을 간 적이 있다. 길가에 집을 짓고 있는데 일하는 사람은 한두 명이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성거리는 사람이 10여명이 넘었다. 이들이 서류로 보고되기는 하루종일 열심히 일한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런 허위를 바탕으로 서류가 만들어지고 그것을 읽느라, 또 이를 근거로 정책을 구상하느라 북한의 지도자는 밤을 새우는 것이다.

북한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허위(虛僞)의 시스템 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허위와 거짓의 바탕 위에서 아무리 노력을 하고 업적을 쌓는다 해도 그것은 허위의 연속이며 거짓의 확대일 뿐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천문학자들이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잘못 알고 천동설을 바탕으로 1천년 이상 천문학을 축적했다. 그러나 지동설이라는 진실이 드러났을 때 천년의 천문학은 쓰레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들인 공은 도로(徒勞), 즉 헛된 노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가, 사실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이 학문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이다. 2주 전 한.미 정상회담 때의 일이다.

한국과 미국의 시차 때문에 우리 당국자는 회담이 열리기 전 한국 기자를 상대로 사전 브리핑을 했다. 정상회담에서 이런저런 결론이 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은 한국의 대북정책을 지지하고,

양국은 공조체제를 유지하고… 등 밝고 좋은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외교부장관.국정원장 등 많은 사람이 정상회담을 준비한다고 이곳을 다녀갔다. 그들이 왔을 때 부시 행정부의 강한 목소리는 워싱턴 도처에서 들렸다. 그러나 우리측의 브리핑에는 이런 분위기가 전혀 반영돼 있지 않았다.

이들은 이런 목소리를 못 들었는지, 듣고도 거짓으로 청와대에 보고했는지 알 수 없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정상회담 자료를 챙기느라 밤 늦도록 일을 해 오른쪽 눈에 병이 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진실에 기초한 國政돼야

그렇다면 대통령은 혹시 거짓 보고나 진실과 다른 자료를 가지고 밤을 새우지는 않았는지, 국정의 다른 분야 역시 이렇지는 않은지 궁금하다.

이 정부는 3년이 넘도록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러나 지금의 현대 살리기, 언론 세무사찰을 보면서 누구도 이것이 시장경제요 민주주의라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계속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되뇌며 거기에 맞춰 서류를 만들고 정책이라는 것도 세울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목표는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잘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그 목표 하나만은 진실이었다.

그 진실 위에 우리 모두가 벽돌을 쌓았다. 그래서 성공한 것이다. 지금 우리 정부의 목표는 이러한 진실 위에 기초한 것인가, 아니면 그럴 듯한 허울인가. 그것이 구호일 뿐 말 따로 행동 따로라고 한다면 지금 정부는 모래 위에 집을 짓고, 허위 위에 성을 쌓고 있는 것이다. 허위의 시스템 속에서 도로의 헛된 수고로 남은 기간을 허비하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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