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탈레반 '테러' 방치하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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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빈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 .

인도네시아의 국가 표어다. '다양성 속의 통일' 이라는 의미다. 인도네시아의 특성이 이 한마디에 응축돼 있다. 사실 인도네시아는 다양성의 상징 같은 나라다. 모두 2백43개 종족에 언어만도 5백7개나 된다.

이들을 한 보따리로 묶을 언어로 무엇을 선택해야 했을까. '다수결 원칙' 에 따라 인구 60%에 가까운 자바족이 사용하는 자바어를 표준어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건국 초기의 현인(賢人)들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 서쪽 수마트라섬 산골 팔렘방 지역의 언어인 멀라유(Melayu)를 가져다가 국가 공용어로 삼았다. 그러자 어떤 종족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종교는 언어보다 더욱 민감하다. 여기서도 현인들의 지혜는 빛났다. 판차실라(건국 5원칙)에 '모든 국민은 반드시 종교를 가져야 한다' 고 규정한 것이다. 전체 인구의 88%가 이슬람 신자지만 이들이 타종교를 억누르는 일은 거의 없다.

그건 인도네시아에서는 가장 큰 죄다. 홍콩 음식점에 가면 거의 예외없이 자그마한 불단(佛壇)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부처님만 모시는 것은 아니다. 공자.노자 등 모시는 대상은 각양각색이다. 미운 사람의 이름이 적힌 부적을 내밀면 이 부적을 '두들겨 패주는' 무속인과 성당과 교회, 사찰이 즐비하다.

이처럼 차이를 인정하기, 그리고 나서 함께 어울려 살기는 이제 '지구촌 살이' 의 기본이다. 이 원칙을 거부하면 누구도 편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프가니스탄의 시계침은 정반대로 돌고 있다. 탈레반 지도자 모하마드 오마르는 "불상 파괴는 이슬람과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 라고 강변했다. 아메드 무타와킬 외무장관은 "이 나라는 이슬람 법을 실현하기 위해 건국됐다" 고 엄숙하게(□) 말했다.

1991년 초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폭격했을 때 세계인들이 이라크 국민들의 생명 다음으로 걱정한 것은 바빌로니아 고대문명의 파괴였다.

그때는 '부득이…' 라는 변명이 그나마 가능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낮에 '인류문명사에 대한 테러' 를 종교란 이름으로 감행하고 있다. 인류가 이를 묵인한다면 인류는 문명을 가진 종(種)이 아니다.

진세근 홍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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