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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몰 비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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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단 일을 시작한 뒤엔 그만두려 해도 그때까지 들어간 비용이 아까워 망설이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이미 써버려 돌이킬 수 없게 된 비용을 '매몰비용(sunk cost)'이라고 한다.

예컨대 수백억원이 들어가는 빌딩 건설을 위해 설계에 10억원을 썼다고 치자. 그런데 경기가 얼어붙어 빌딩을 지어도 수익을 올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때 투자자는 설계비를 날리는 셈 치고 공사를 중단할지, 끝까지 공사를 강행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론상으론 현 시점에서 10억원을 잃고 끝내는 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매몰비용에 집착하는 바람에 공사를 강행하기도 한다.

남녀 관계도 비슷할 때가 있다. 학창 시절부터 사귀다 혼기를 맞은 커플이 그럴 것이다. 서로 '이 사람과 결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번쯤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결국 '그놈의 정 때문에'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새 연애 상대를 찾을 엄두가 나지 않거나 그럴 여력이 없다는 점이 더 큰 이유일 수 있다. 오랜 교제에 들인 시간과 정성, 즉 매몰비용이 '정'을 합리화한다는 얘기다.

경영학자들은 의사결정을 할 때 매몰비용에 매달리지 말라고 권한다. 매몰비용은 잘못된 결정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된다. 또 매몰비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비용인데도 투자로 오인되기도 한다. 이때 투자자는 계속 돈을 쏟아부으면 언젠가 투자효과가 나올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잘못된 결정인데도 끝장을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하들리 아키스는 1985년 심리 테스트를 통해 개인적인 결정에서 매몰비용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50%나 된다고 지적했다. 그 후 심리학계의 연구에선 개인보다 집단이 매몰비용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원회나 추진단 같은 합의체가 댐.도로 등 대규모 투자사업을 결정할 때 매몰비용에 휘둘리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선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은 그나마 다행일 수 있다. 논란이 많던 수도 이전을 매몰비용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그만두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헌재의 결정에 시비를 붙으면서 사회적 비용을 추가로 매몰시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남윤호 패밀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