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강(强)하다는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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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 선인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약능승강(弱能勝强)이라는 것이 있다.

약한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이다. 이기는 것은 모두 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약한 것이 어떻게 강한 것을 이길 수 있을까.

민초(民草)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맹자(孟子)에 의하면 민초는 지극히 미약하고 천한(至微賤也) 존재다. 그러나 어떤 강자도 그 마음을 얻지 못하면 권좌에 이를 수 없고 설혹 이르렀다 해도 쫓겨나고 만다는 것이다.

또 즐겨 쓰는 말 중에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것이 있다. 유약한 것이 능히 굳센 것을 제압한다는 말이다. 굳세야 반드시 상대를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부드러운 것이 억센 것을 이길 수 있을까.

물이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 어떤 굳셈도 물을 이길 수는 없다. 노자(老子)의 말이다.

요사이 '때 아닌' 강성론(强性論)이 일고 있다. 북쪽에서는 '강성대국' (强盛大國)을 외치고 있고, 남쪽에서는 '강한 정부' '강한 여당' 을 부르짖고 있다. '때 아니다' 란 말은 시류(時流)에 어긋나 있다는 말이고 시의(時宜)를 잃었다는 말이다.

이미 2천5백년 전 노자.맹자시대도 그러했거늘 사고와 행위유형이 완전히 달라진 지금 아직도 그 말을 쓰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시류를 모른다는 것이고 그만큼 시의에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권력자 주변에 시류와 시의를 아는 지식인이 없다는 이야기도 된다.

강성대국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물이다. 부국강병을 부르짖고 제국주의로 치닫던 시대의 국가론이다. 강한 정부, 강한 여당도 80년대 이전 권위주의시대의 정부론이며 정당론이다.

'힘이 국가의 아버지' 라고 생각하던 시대의 산물이 강성국가론이고, '권력이 통치의 단초(端初)' 라고 생각하던 시대의 발상이 강한 정부론이다.

'1당 혹은 1.5당제만이 장기집권의 보루' 라고 생각하던 시대의 정권 재창출 행태가 또한 강한 여당론이다.

모두 근육의 힘을 자랑하고 폭력을 숭상하고 하드웨어만이 존립요건이라고 믿던 시대의 사고방식이다. 힘으로 밀면 쟁취하고 권력으로 다스리면 제압당하던 시대의 행위유형이다. 상생(相生)보다 상극(相剋)을, 시너지보다 제로섬을 더 원초적으로 생각하던 시대의 착상들이다.

지금 그 사고, 그 발상으로 국가가 관리되고 국민이 다스려진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더 이상 동시대인의 사고가 아니다.

그 사고, 그 발상으로 비판에 재갈을 물리고 반대자들의 저항을 분쇄하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더 이상 국가관리자 노릇을 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시대에 강성대국을 만들어 제국주의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해서 남의 나라를 힘으로 제압하겠다는 것인가.

지금 이 시대에 강한 정부를 만들고 강한 여당을 만들어 신권위주의시대.신관치주의시대를 만들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해서 적나라한 권력의 힘으로 국민을 한번 다스려 보겠다는 것인가. 역사상 어느 국가도 강성함을 내세워 쇠퇴하지 않은 국가가 없고, 강한 정부를 내세워 약체정부가 되지 않은 예가 없다. 더구나 강한 여당을 부르짖어서 해체되지 않은 정당이 없다.

진실로 강한 것은 강(强)을 믿지 않고 강(剛)에 의존하지 않는다. 강(强)한 것은 반드시 무너지고 강(剛)한 것은 반드시 깨어지기 때문이다. 진실로 강한 것은 원칙이고 도덕이며 투명이고 책임이다. 진실로 강한 정부는 이 원칙과 도덕과 투명과 책임을 바탕으로 한 효율적인 정부다.

진실로 강한 여당은 이들을 기반으로 한 경쟁의 규칙을 분명히 지키는 정당이다.

강(强)을 내세우는 도덕이 없고, 강(强)을 목표로 하는 원칙도 없다. 어떤 투명성도 강자에게선 나오지 않고 어떤 책임감도 강자의 손에선 이뤄지지 않는다. 강한 힘만큼 부패의 터널도 어둡고 길다.

강(强)은 이미 오래 전에 껍데기만 남은 개념일 뿐이다. 그 껍데기 개념에 집착해 서로 편가르고 서로 욕설하고 서로 억압하는 지나간 시대의 사고며 행태는 이제 버려야 한다.

송복 <연세대 교수.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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