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입 없는 남자, 낡은 호텔 … 이미지 강렬한 단편 22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스타호텔 584호실
배리 기포드 지음, 최필원 옮김
그책, 268쪽, 1만1000원 

아름다운 악몽을 꾼 듯하다. 강렬한 이미지에 허덕이다 책을 덮었다. 미국 작가 배리 기포드의 기묘한 단편 소설집이다. 짤막한 이야기 스물 두 편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거듭 돌아보자. 저자가 배리 기포드다. ‘컬트 무비’의 거장 데이빗 린치와 나란히 불리던 이름이다. 린치는 존재하는 세상을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로 포착하는 감독이다. 현실 너머의 이미지를 현실인 양 꾸며내 의뭉스런 영화를 빚어낸다. 그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광란의 사랑(1990)’의 원작자가 배리 기포드다. 린치의 문제작 ‘로스트 하이웨이(1997)’도 기포드와 함께 집필했다.

이쯤 되면 저자의 집필 방식을 알아챌 만하다. 그러니까 그는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이야기가 빚어내는 이미지의 파편을 주목한다. 그 이미지들이 충돌하며 일으키는 의미 작용이 소설의 외연을 넓힌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이 낡은 모텔, 고립된 마을, 입 없는 사람 등 강렬한 이미지를 걸치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그 이미지는 대체로 음울하다. 책은 화려한 나라 미국에서 변두리로 내몰린 인물과 사건에 주목한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시골 모텔에 사는 일본계 미국인 소녀가 바깥 세상을 동경하는 이야기(‘아메리칸 폴스’)나 낯설고 추운 곳에 버려진 남자 아이의 방랑기(‘잃어버린 크리스마스’) 등 냉소적이고 헛헛한 이야기로 빼곡하다.

해서 그로테스크(grotesque)와 바이올런스(violence)는 자연스레 이 책의 핵심 이미지로 떠오른다. 표제작 ‘스타호텔 584호실’을 들춰보자. 구닥다리 모텔에 한 남자가 투숙한다. 그는 좁은 방에서 알 수 없는 독백을 내뱉는다. 건너 방에 투숙 중인 남녀의 사랑 소리에 욕지기를 뱉는다. 그러다 남자가 심각한 범죄에 연루됐음이 불쑥 드러난다. 입 없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무언’은 좀 더 직접적이다. 입이 없이 태어난 남자가 주인공인데, 상상만으로도 기괴하다. 입이 없는데 어떻게 키스를 할까 궁리하는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이런 대목이 현실을 교묘하게 비튼다. “세상 모든 이에게 입이 없다면 누가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이미지의 파편이 떠돌듯 문장 역시 압축적이다. 툭툭 끊어지는 단문이 짧은 단편을 단단히 움켜쥔다. 책에 담긴 22편의 이야기는 영화로 치자면 각각 하나의 씬(scene)처럼 보이기도 한다. 활자를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데 탁월한 저자는 한 편의 영화같은 소설집을 내놨다. 거장 데이빗 린치가 그를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정강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