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성급한 회복론, 교훈 잊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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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시중 자금사정이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얼어붙었던 은행과 제2금융권의 돈줄이 약간씩 풀리고 회사채와 기업어음 발행도 늘고 있다.

거래가 완전히 끊겼던 신용도 BBB급 회사채를 찾는 사람이 생기고 금리도 하향안정세를 보인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다시 한국 증시를 찾는가 하면 투신사 수탁고도 늘고 있다.

심각한 신용경색으로 괜찮은 기업까지 부도 위기에 전전긍긍했던 지난해 말을 생각할 때 이런 변화는 여간 다행이 아니다.

정부도 최악의 상황은 지났다며 한숨 돌리는 모습이고, 민주당 쪽에서는 성급한 경기회복론까지 나온다.

그러면 과연 자금시장이 안정을 회복한 것으로 봐도 좋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최근 상황을 놓고 '회복' 운운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고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사정이 나아진 것은 금융시스템의 회복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돈 쏟아붓기에 따른 '반짝효과' 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정부는 최근 '선(先)체력 보강-후(後)구조조정' 을 내세우며 다양한 부양책을 동원하고 있다.

산업은행을 통한 회사채 신속 인수를 비롯해 예산 조기 집행과 공적자금 방출, 건축경기 활성화 등이다.

그 바람에 착시(錯視)현상이 나타난다는 지적이다.

1년여 전에도 우리는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당시도 공적자금 대량 방출 등으로 시중에 돈이 넘쳤고 증시 호황과 맞물리면서 지표경기가 나아졌다.

이에 정부가 "위기는 지났다" 며 성급하게 낙관론을 펴는 바람에 구조조정은 물건너 갔다.

이로 인해 우리 경제는 지금 다시 고통을 겪고 있다.

지금도 자금경색은 일부 풀렸다지만 아직 설비투자나 소비가 회복되는 조짐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언제 자금경색이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일부 경기 부양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지금 더 급한 것은 구조조정을 바탕으로 한 경쟁력 강화다. 일시적 금융지표에 현혹돼 또다시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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