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소리]"한국인이 너무 무서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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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얼마 전 초등학생인 두 딸의 일기장을 살피다가 어지럽혀진 책상을 치웠다.

그러던 중 크레파스에 '살색' 이라 적혀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 자신도 지금까지 자연스레 '살색' 이라고 불러 왔지만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감상자도 열어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도 '살색' 이 있었다.

한국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을 상담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돕는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아니 어째 이런 일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피부색만 '살색' 이라면 다른 나라 사람의 피부색은 '살색' 이 아니라는 뜻 아닌가.

이런 의식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러나 현실을 뜯어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 '코리안 드림' 을 찾아 제3세계의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대부분 자기 나라에선 최고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취업을 기피하는 위험하고, 힘들고, 열악한 '3D업종' 에서 생산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상당수 한국인들은 이들을 따뜻하게 대하고 돌봐준다.

그러나 '미꾸라지 몇 마리가 온 방죽을 흐린다' 는 옛말처럼 일부는 그들의 인권을 짓밟는다. '인권후진국' 이라는 오명이 그래서 있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인에게 폭행당하고 찾아와 호소할 때 우리는 가장 당혹스럽다. 그들은 한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철야작업을 할 때 항상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생산하도록 돼 있다.

그러니 한국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게으름을 피운 격이 돼 '열심히 일하지 말라' 며 외국인 노동자를 때린다고 한다.

한 외국인은 작은 공장에서 몇 년째 일하다 보니 최고참으로 공장장처럼 일을 지시하게 됐다.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한국인과 말다툼 끝에 얻어맞아 상담을 해왔다.

그런가 하면 한국인 상급자의 지시(말)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이유로 쇠파이프로 얻어맞아 팔뼈가 으스러진 외국인도 찾아온 적이 있다.

가해자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는 "다른 외국인 애들도 모두 다 맞고 있는데 왜 그 ××만 난리를 치는가" 라며 도리어 화를 냈다. 그래서인지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인들이 무섭다고 한다.

동방예의지국을 자랑하는 우리 민족의 심성이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약소민족으로서 살아 온 때문일까, 아니면 단일민족을 주장하는 배타성 때문일까. 한국사람들이 피부색이 흰 백인들에게 유독 호의적인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중 이란.파키스탄 출신 등은 욕을 먹거나 얻어맞고 하소연해 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피부색이 검지 않고 체격도 크고 당당한 유럽인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동남아 노동자이면서도 방글라데시.인도네시아.스리랑카 등에서 온 이들은 피해를 호소해 오기 일쑤다.

단지 피부색이 우리보다 더 검고 키도 작고 몸집이 왜소하다는 이유에서 그럴 것이다.

우리의 뇌리에는 아직도 피부색이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이중잣대와 선입견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왔다" 고들 둘러댄다고 한다. 그러면 '검둥이' 라고 손가락질도 하지 않고 커피를 권하는 등 정중히 대하며 "영어 좀 배울 수 없겠느냐" 고 물어온다는 것이다.

우리 단체에서 일하는 독일인 목사 한 분은 "한국인들이 나에게 너무 친절하게 대해 준다" 며 "하지만 내게 베푸는 친절의 절반이라도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베풀어주었으면 한다" 고 말했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우리의 의식 속에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하는 비인간적인 편견을 없애고 세계화시대에 걸맞은 의식을 가져야 한다. 크레파스나 물감에서 '살색' 이라는 표기를 없애는 발상의 전환부터 서둘러야 한다.

<관련단체 연락처> ▶성남외국인노동자의 집(031)756-2143▶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031)492-8785▶광주외국인노동자의 집(062)971-0078▶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02)747-6831

金海成(목사, 성남 외국인노동자의 집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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