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꽁꽁 얼어붙은' 은행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퇴직금이라도 건지려면 기업에 함부로 대출해 주지 말라. " "감독기관과 상부의 지시는 문서로 받아라. " "민감한 지시사항은 녹음해 근거를 보관하라. "

예금보험공사가 부실 금융기관 임직원의 재산을 압류하고 공적자금 투입 은행장에게 경영개선계획을 책임지고 이행하라는 각서를 요구하자 기업 대출을 기피하는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면서 은행권에 이런 말까지 등장했다.

특히 금감원이 1인당 영업이익,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등 경영지표를 우량은행 수준으로 요구하자 일부 공적자금 투입은행은 "너무 무리하게 밀어붙인다" 며 반발하고 있다.

서울은행의 경우 올해 말까지 1인당 영업이익 2억원, 내년엔 2억3천만원을 달성하도록 돼 있다. 은행측은 그러나 정상적인 영업으론 이 목표를 이루기 어려운 것으로 보고 있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모 은행 관계자는 "현 상황에서 정부가 제시한 경영개선 목표는 큰 기업 하나만 넘어가도 달성할 수 없다" 면서 "목표를 이룩하려면 신규 여신은 가급적 피하고 기존 여신도 기회만 있으면 회수해야 한다" 고 말했다.

또 다른 모 은행은 은행장의 경영개선계획 이행각서가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지를 법률사무소에 물었다.

경기도 의정부 T가구 H사장은 지난주 거래은행이 대출을 약속한 날에 찾아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은행 요구대로 담보까지 제시했는데 담당 직원은 "담보는 충분한데 매출이 시원찮다" 는 등 꼬투리를 잡으며 퇴짜를 놓았다.

공적자금 회수를 위한 것이라지만 예보가 지난해 말 부실 금융기관 임직원을 상대로 6천7백억원의 재산을 가압류한 점도 은행 임직원의 심리를 얼어붙게 했다.

웬만한 기업에 대해선 신규 대출 결정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전임자가 결정한 대출에 대해서도 만기 연장이나 대환(貸換)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대신 금리가 낮아 역마진을 보더라도 떼일 염려가 없는 국고채 투자에 매달리는 상황까지 빚고 있다.

모 중소업체 사장은 "은행에서 대출가능 등급(10등급 중 1~6등급)으로 분류했는데 하위 등급이라며 대출이 안된다고 했다" 면서 "가산금리를 물겠다고 했는 데도 막무가내였다" 고 말했다.

A은행 여신담당 직원은 "지난해 한 임원이 친지의 5백만원짜리 개인 대출을 부탁했는데 점포장이 자격이 없다며 거부했다" 면서 "개인 대출이 이 정도인데 기업 대출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등 안전한 경우가 아니면 도장을 안찍는 분위기" 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 BIS 비율을 맞추느라 지난해 말 은행들은 기업 대출을 대거 회수했다.

은행권의 대기업 대출금은 지난해 11월 1천3백91억원, 12월 3조4천8백63억원이 줄었다.

중소기업 대출도 11월에 9천4백60억원 늘었다가 12월에는 4천7백57억원 감소했다.

윗선에서 부탁하는 대출도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우려가 있으면 거부하거나 증거로 삼을 수 있는 문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금감원이나 은행 임원의 전화 지시사항을 녹음해 보관하는 직원들도 있다.

또 예보의 가압류 조치에 대비해 재산을 다른 사람 명의로 옮기거나 은행 예금을 다른 금융기관에 제3자 명의로 바꿔 예금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재산 가압류에 압박을 느낀 일부 직원들이 재산을 남의 명의로 돌려놓고 있다" 면서 "대출 과정에 하자나 중대한 과실이 없다면 책임을 물어서는 곤란하다" 고 주장했다.

한편 예보는 은행원들이 지나치게 위축돼 기업 대출을 꺼리는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전국 순회강연을 갖고 부실 금융기관 임직원의 처벌 범위 등에 대해 설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박시호 조사1부장은 "은행법이나 금감원 지침 등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단순한 판단 잘못으로 은행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경우는 없다" 면서 "설령 이사회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려 부실이 생기더라도 당시 반대를 한 임원들은 처벌하지 않으므로 소신있게 의사 표현을 해야 한다" 고 말했다.

정철근.최현철.하재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