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밴쿠버] “아~ 진짜 말도 안 돼 … 두 번째 금 꿈만 같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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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수(21·단국대)도 “그때 바나나를 잡지 말았어야 하는데…”라며 씁쓰레한다. 길게 처진 눈매에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원숭이를 닮았다며 친구들로부터 놀림깨나 받았기 때문이다.

빙상 선수들은 ‘미끄러진다’는 징크스를 의식해 바나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밴쿠버 올림픽 2관왕 이정수에게 바나나는 노란 금메달의 상징이 됐다. 이정수는 27일 5000m 계주에서 3관왕에 도전한다. 같은 날 500m 출전 여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남자 쇼트트랙 1000m 결승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이정수(가운데)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하고 있다. 간발의 차로 금메달을 놓친 이호석(왼쪽)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이정수의 오른쪽은 3위를 차지한 미국의 안톤 오노. [밴쿠버 로이터=연합뉴스]

◆오노 끌어내린 당찬 21세=AP통신은 올림픽 직전 이정수를 3관왕 후보로 꼽았다. 성시백과 이호석이 잔 부상에 시달리며 2009~2010 월드컵 3, 4차 대회에 불참한 사이 꾸준히 랭킹포인트를 쌓아 1000m와 1500m 랭킹 1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에선 이정수의 3관왕 가능성을 낮게 봤다. 쇼트트랙 대표팀의 기둥은 이호석(24)과 성시백(23)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내 이정수는 선배들보다 항상 한발 앞섰고, 경계대상 1호였던 안톤 오노(28·미국)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멀찌감치 달아났다. 이정수는 14일 15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따낸 뒤 “오노는 시상대에 오를 자격이 없는 선수”라며 격분했다. 준결승에서 노골적으로 자신을 손으로 밀친 오노가 결승에서 이호석과 성시백이 엉켜 넘어져 ‘어부지리 은메달’을 따냈음에도 오히려 “한국 선수들이 팔을 쓴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정수는 1000m 레이스 후미에 있다가 세 바퀴를 남겨두고 이호석을 따라 앞으로 치고 나갔다. 이정수는 경기를 마친 뒤 “(이)호석형이 막판 스퍼트를 내면서 다른 선수들의 체력 소모가 많았다. 그 덕분에 나는 신체 접촉 없이 앞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3위 오노는 뒤에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치고 나가자 몸싸움을 벌일 타이밍조차 잡지 못했다. 마지막엔 ‘이정수 타임’이었다.

전명규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은 “평소에는 조용하고 성실한 선수이지만 기회를 한번 잡으면 놓치지 않는 스타일이다. 1000m 결승전에서도 몇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그런 근성이 금메달을 따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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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앞에선 울렁울렁=이정수는 이날 인터뷰에서 “말도 안 돼요. 두 번째 금메달은 꿈만 같아요”라며 해맑게 웃었다. 인터뷰 도중 “아~ 진짜, 말도 안 돼”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그는 “원래 남에게 주목 받는 거 좋아하지 않아요. 솔직히 ‘카메라 울렁증’도 있어요. 평소 카메라를 보면 어지러운데 오늘은 기분이 좋네요”라며 웃었다.

남보다 늦은 12세에 첫 경기를 치른 이정수는 2006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개인종합 1위를 차지했으나 2008년에야 월드컵 무대를 처음 밟을 정도로 크게 주목 받진 못했다.

체육과학연구원이 지난해 실시한 측정에 따르면 이정수의 신체조건은 뛰어나지 않다. 키(1m71㎝)와 몸무게(60㎏)는 평균이고, 허벅지(약 52㎝)와 종아리(약 35㎝)는 오히려 동료에 비해 가늘다. 그러나 전체 균형이 좋아 체중 대비 파워가 뛰어나고 무엇보다 패기 넘치면서도 침착한 마음가짐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깨방정수’ 귀여워=네티즌들은 이정수를 ‘깨방정수(깨방정을 떤다는 뜻으로 붙인 애칭)’로 부른다. 그가 미니홈피에 올려놓은 동영상에는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정수의 모습이 여럿 있다. 네티즌은 ‘이정수 레알 귀요미(정말 귀엽다는 뜻의 인터넷 은어)’라는 등 수많은 댓글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 이도원(49)씨는 “정수는 말수가 없고 어른스럽다. 첫 금메달을 딴 뒤 ‘아버지, 인터뷰 많이 하지 마세요’라고 했을 정도다. ‘동료를 위해 계주가 가장 중요하다. 꼭 금메달을 따겠다’고 할 만큼 사려 깊은 아이”라고 말했다.

김식·김동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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