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DJ와 김중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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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DJ와 김중권. 두 사람이 난국을 맞아 '대통령과 집권당 대표' 로 다시 함께 섰다. 정권 출발 때 비서실장으로 호흡을 맞춘 그를 DJ가 다시 불렀다.

그 배경에는 '필요와 신뢰' 라는 둘만의 끈이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사연을 찾아가면 DJ가 그를 택한 이유가 나온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92년 5월 시작됐다. 노태우 대통령의 마지막 정무수석이 된 金이 야당(옛 민주당)대표이던 DJ의 동교동 집에 인사하러 간 날이다.

그 첫 느낌을 金은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서재에서 기다리며 수많은 책 중 내 전공인 헌법 관련 책을 꺼내보고 놀랐다. 여기저기 밑줄이 쳐있고 깨알같이 메모가 적혀 있었다. 다른 책들도 그랬다. 풍부한 정치식견과 통찰 뒤에 이게 있었구나 하는 경외심이 들었다. "

대선을 석달 앞둔 그해 9월. 盧대통령이 중립내각을 선언한 뒤 그는 또 DJ에게 갔다. 거국내각에 넣을 야당사람을 추천받기 위해서였다.

DJ는 "선거중립 의지를 높게 평가한다" 며 각료 추천을 정중히 사양했고, 金은 그런 DJ를 다시 새겨두었다고 한다.

두달 뒤 金은 盧대통령이 내놓은 대선자금 20억원을 DJ에게 전달했다. 뒤에 '20억+α' 설로 시끄러워진 사건이다.

그 대선에서 DJ는 졌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며칠 뒤인 93년 1월 1일. 金은 DJ가 보낸 휘호를 하나 받았다.

'人知坐輿樂 不識肩輿苦(인지좌여락 불식견여고 : 가마 탄 즐거움은 알면서 가마를 멘 사람의 고통은 모른다)' 라는 다산 정약용의 글이다.

'언젠가 그를 가마에 태우리라' 고 마음 먹었던 걸까. 5년 뒤인 97년 대선 직전 두 사람은 동지가 된다. 교수(단국대)로 있던 그를 DJ가 "도와달라" 고 불렀다.

영남(울진)사람인 그에게 DJ는 "힘을 합쳐 지역화합을 통한 민족화합을 이룹시다" 고 설득했다.

金은 DJ의 대선전략자문회의를 맡았고, 대선에서 이겼다. 선거 사흘 뒤 DJ는 그를 일산 집에 불렀다. 이번엔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세번을 청했다.

그때 金에 대한 DJ의 평가는 이랬다. "현역의원 때부터 金의원을 관심 깊게 보아왔다. 처신과 됨됨이가 바르고, 역대 정권의 성공과 실패를 몸으로 체험한 분이다. 지역감정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가 필요하다. "

야당만 해온 호남의 DJ와 여당만 했던 영남의 金은 그렇게 집권을 시작했다. DJ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울 사람으로 그를 골랐다.

임기를 2년 남긴 지금 DJ는 똑같은 심정으로 그를 가마에 태웠다. 그를 당 대표에 앉히며 DJ는 이런 당부를 했을 것 같다. "강한 여당으로 개혁과 국정안정을 뒷받침하고 지역화합에 힘써달라. " 지금 金대표가 선 곳은 폭풍 한복판이다.

사나운 민심과 으르렁대는 야당에 포위돼 있다. 새해를 여야는 2002년 대선의 기세를 잡는 해로 삼고 있다. 이래저래 지금보다 더 거칠어질 정치판이다.

그는 27일 "대권 도전 뜻이 없다" 고 했다. 전날엔 "정부는 배, 국민은 바다" 라는 마음을 가지라고 당에 주문했다. 소란한 정치환경에서도 사심없이 가마를 멘 사람(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전력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그와 DJ가 나눠온 '필요와 믿음' 이란 인연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져 갈는지는 그가 이런 약속을 어떻게 지켜가느냐에 달렸다.

김석현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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