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유럽 거물들 비밀리에 모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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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더버그 회의가 열린 독일 남부 뮌헨 인근의 도린트 소피텔 호텔.

지난 5일 독일 뮌헨에서 동쪽으로 60㎞ 떨어진 작은 마을 로타하 에거른. 188개의 객실을 갖춘 도린트 소피텔 호텔에 잇따라 낯익은 인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제임스 울펀슨 세계은행 총재, 데이비슨 록펠러 전 체이스 맨해튼 은행장, 도널드 그레이엄 워싱턴 포스트 발행인, 요제프 아커만 도이치방크 회장, 위르겐 슈렘프 다임러 크라이슬러 회장, 조르마 오릴라 노키아 회장 등. 하나같이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춘 쟁쟁한 인물들이다.

이날 저녁식사부터 8일까지 이들은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편안한 차림새로 빌더버그(Bilderberg)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미국과 유럽 각국의 정계.재계.언론계 핵심 인사 120명의 비밀결사체다. 빌더버그란 명칭은 1954년 첫 모임을 연 네덜란드의 호텔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 모임은 미국의 대외관계협의회(CFR)와 3자 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등과 함께 막후에서 세계의 현안을 주무르는 '그림자 정부'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CFR은 격월간'Foreign Affairs'를 발행하는 민간 연구기관이고 3자 위원회는 미국.유럽.아시아 지역의 전직 고위 관리, 학자 등이 주축인 연례 비공개 국제회의다. 빌더버그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논의됐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다. 참석자들은 비밀 준수 서약을 하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 LA 타임스, ABC, CBS, NBC 등 미 대표 언론의 간부들도 참석하고 있지만 규정대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관계자들이 회의장소조차 쉬쉬하고 있을 정도라 현재 독일 언론에는 한 줄의 기사도 나오지 않고 있다. 호텔 주변은 경호원들로 철옹성처럼 에워싸여 있고 호텔 측은 회의기간 중 '방이 동났다'며 일반 투숙객을 받지 않고 있다. 워낙 비밀덩어리라 회의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다소 부정적이다. 그래서인지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에티엔 다비뇽 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은 "이 회의는 세계를 주무르는 자본가들의 음모가 아니다"고 해명하고 있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올해 개막 회의에선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주재로 '자유(Freedom)의 의미'를 둘러싸고 열띤 토론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란 용어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지난 취임 연설에서 언급하면서 국제적인 의제(Agenda)로 떠올랐다. 비민주적인 국가의 정권을 교체하는 데 나설 수 있다는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을 시사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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