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미소짓는 물고기' 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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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소시민들의 일상에서 날렵하게 낚아 올린 삶에 대한 가벼운 성찰, 우울한 주제조차 웃으며 음미하게 만드는 붓터치, 짧지만 거듭 되새김질되는 그림 밑의 간단한 지문(地文)….

이쯤에서 프랑스의 삽화작가 장 자크 상페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요즘 독서 유행에서 다소 뒤처진 편이다.

상페의 성인용 그림책 '라울 타뷔랭' 이나 '속깊은 이성친구' 등에 젖어본 독자라면 '대만 판(版) 젊은 상페' 쯤 되는 지미(幾米)와의 만남도 즐거울 게 분명하다.

잘 나가던 광고 디자이너였던 작자는 백혈병에 걸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재활에 성공, 1998년 첫 작품집을 내며 본격적인 창작생활을 시작했다.

삽화의 생동감, 언어의 시적 묘미에선 상페에 못미치는 듯 싶지만 동양적인 윤회.인연 사상 등이 가미된 작품세계가 한국인의 정서에 또다른 호소력을 갖는다.

어항 속에 갇혀 있는 물고기를 바다에 돌려보냄으로써 물고기에 자유를 선물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미소짓는 물고기' 에선 바로 그런 윤회사상이 엿보인다.

녹록잖은 주제지만 환상적이면서 유머러스한 삽화들이 결코 작품을 무겁게 만들지 않는다.

비교적 가벼운 색감의 수채화라든지 여백의 미를 살려주는 짤막한 문장들에선 상페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왼쪽으로 가는 남자 오른쪽으로 가는 여자' 는 도시 남녀의 우연한 만남과 끝없는 엇갈림을 그린 작품. 적막하고 우울한 도시 정서를 표현했지만, 그러나 주인공들이 떠난 집의 벽이 봄볕과 함께 갈라지면서 새가 깃들이는 마지막 장면은 따스하다.

단편 모음집 '어떤 노래' 는 조금 다른 스타일을 보인다.

동양의 민화같은 간결하고 만화적인 소묘들을 통해 보다 직접적이고 통렬하게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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