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유언비어 누구 책임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유언비어(流言蜚語)는 군사 독재정권 시절의 한 풍속도였다. 언론에 재갈이 물려 비판은커녕 사실 전달조차 첨삭.왜곡되는 상황에서 각종 루머는 자연발생적으로 횡행했다.

'카더라' 방송 중엔 사실로 확인된 것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론 불신을 키우고 사회불안을 부추기는 사회악으로 작용했다. 유언비어는 정보의 음습한 유통경로로서 독버섯과 같은 특성을 갖고 있다. 음지, 비정상적인 사회 분위기를 먹고 자라는 특성이다.

그런데 노벨상까지 받는 인권 선진국가에서 느닷없이 유언비어 단속이라니 잠자다 뒤통수를 맞는 격이다. 집권 민주당에서 각종 루머가 판친다며 대책을 논의하고 경찰은 진원지 색출에 나섰다니 참으로 한심한 세상이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로 후퇴하게 됐을까. 언론의 사실접근 능력이 미흡한 탓일까. 그것도 한 이유일 수 있다. 언론이 반성할 대목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 원인은 정책과 법집행의 불투명성에 있다고 본다.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가 불투명하니 궁금증이 남고, 불신과 의혹으로 변질되면서 유언비어가 자라는 토양이 형성됐다고 본다.

민주당 지도부가 우려한 유언비어 내용들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노벨평화상을 돈 주고 받았다" "남북 정상회담도 돈이라더라" 는 루머고 또 하나는 최근 잇따른 불법 대출사건과 관련한 여권 고위인사들의 연루 소문이다.

밑도 끝도 없는 루머가 횡행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사회현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째서 이런 루머가 생성되고 활개칠 수 있느냐에 대한 반성이 더 필요하다는 점이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대부분의 대북정책은 비공개적으로 이뤄졌다. 정상회담 전후 과정에 궁금한 게 많은데도 수행원들의 '무용담' 만 무성했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공항 마중을 사전에 알았는지를 놓고 관계자마다 말이 달랐다. 아직도 누구 말이 맞는지 알 길이 없다. 북쪽에서 기피한다고 쫓겨나듯 출국하는 적십자사 총재의 쭈글스러운 모습, 북한 경비정이 월경해도 쉬쉬하며 덮기 급급한 당국의 태도, 국민은 왜 그래야 하는지 궁금한데 속시원한 설명이 없다.

대기업 정책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다. 밀실에서 몇 사람이 우물쩍 처리하는 것처럼 비치니 의구심이 생기고 소문이 꼬리를 물게 된다.

각종 권력형 비리사건이 거듭 터졌지만 검찰의 수사결과는 의혹만 부풀리니 곁가지 루머가 양산되는 것이다.

정부는 루머를 단속한다고 나서기 전에 원칙에 맞는 투명한 정책결정을 했는지, 권력형 비리가 발을 못붙일 만큼 엄정한 수사와 법집행이 이뤄졌는지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인치(人治) 아닌 법치의 제도화가 이뤄진 다음에도 루머가 떠돈다면 그땐 국민의 잘못이다. 루머가 판치는 불신사회의 1차 책임은 정부.여당에 있다는 인식이 더 급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