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그래도 도시락은 싸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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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또? 하지만 또 올 모양이다. 시중 경기가 심상찮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말만 들어도 끔찍한 구조조정이라는 그 괴물이 또 꿈틀거린다. 이건 막아야 한다. 어디 한 가족의 생계만인가.

쫓겨났다는 자괴감, 거기다 왜 우리만? 나만? 하는 피해의식까지, 한 인간의 자존심마저 깡그리 무너뜨린다.

처참하다. 누가 이를 모르랴. 모두가 아프다. 오죽하면 지난 구조조정 때 인사 상무가 자살을 했을까. 겨우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잔류 동료의 죄책감도 심각했다.

떼를 써서라도 막아야겠는데 돌아가는 사정이 아무래도 피할 수 없는가보다. 미적거리다 다 넘어진다는 게 엄포로 하는 소리도 아닌 모양이다.

정말 피할 수 없는 고개인가. 하긴 세계 최강 미국도 구조조정을 아프게 겪었다. 우리가 올림픽 준비 하느라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1980년대 초반, 미국엔 가위 혁명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실업률 12%, 하지만 냉철한 미국인은 그 고통을 슬기롭게 감내해냈다. 오늘의 미국 호황이 공짜로 된 게 아니다.

그래, 피할 수 없는 고개라면 어물쩍거리지 말고 넘자. 더 어두워지기 전에. 무거운 발이지만 내디딜 수밖에 없지 않으냐. 그리고 이번엔 확실히 하자. 또? 하는 소리가 다시는 없게 하자.

마음 단단히 먹자.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자. 하지만, 그렇다고 시장 경기가 얼어붙게 해선 안된다. 그리고 나보다 더 아픈 이웃 생각도 하면서 이 힘든 고비를 슬기롭게 넘겨야 한다.

도시락을 싸지 말자는 건 그런 뜻에서다. 우린 어려운 시기가 오면 죄없는 도시락론으로 떠들썩하다. 공무원 외식 금지, 이건 탈 위기의 단골 메뉴였다. 한때 국무총리 도시락도 화제가 됐다. '도시락 총리' 로 존경을 받기도 했다.

한끼를 먹는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 시절이었다. 도시락의 역사 속엔 가난과 함께 눈물과 설움,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리서리 담겨있다.

그래서겠지, 어려울 땐 도시락 쌀 생각부터 먼저 한다. 하지만 이젠 그런 시대는 지났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직장 근처 식당이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세주인만인가. 그 몇푼벌이에 생계가 달린 종업원이 일자리를 잃어야 한다. 그 중엔 실직 가장의 아내도 있을 것이다.

애꿎은 도시락 때문에 이 딱한 사람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아서야 될 일인가. 냉정히 따져 보자. 그걸 싼다고 얼마나 가계에 보탬이 될건지, 오히려 더 들 수도 있다.

설령 보탬이 된다한들 그래도 그나마 쌀 수 있는 당신 형편이 낫지 않으냐. 그것만으로도 행운이다.

도시락을 싸지 마라. 그게 이웃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가진 자의 작은 마음씀새다. 그리고 좀 더 넓게는 시장이 돌아가게 하는 불씨가 된다.

아직 시작도 안됐는데 벌써 경기가 얼어붙어서야 될 일인가. 있는 사람은 써야 한다. 그래야 시장이 돌아간다.

물론 아껴야지. 하지만 다른 데 아끼자. 퇴근길 질펀한 대폿잔이야 좀 아낄 수도 있다. 건강에도 좋고. 그렇다고 아예 발길을 끊진 말자. 어려워도 사는 맛까지 잃을 수야 없지 않으냐. 그리고 온종일 집에 죽치고 앉은 '그 친구' 도 불러라. 잊혀지지 않은 사람으로, 그리고 우리에겐 소중한 사람으로 확인시켜라. 이게 어찌 개인의 불행이며 개인의 비극이냐. 자격지심을 가질 것도 자괴심을 가져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건 우리 모두의 아픔이요, 이 시대의 아픔이다. 함께 나눠야 할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내 짐을 잠시 그가 대신 지고 있을 뿐인 것을. 그리고 잊지 마라. 그 대폿집에도 적잖은, 그러나 어려운 손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을 위해서라도 대포 한잔에 호쾌히 웃고 세상의 시름을 날려버리자.

우린 지금 어려운 시대를 맞고 있다. 거리엔 격렬한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내 자리는 괜찮다.

그러나 태풍전야처럼 스산한 분위기다. 곧 바람이 일겠지. 누가 나가야 할지 모른다. 마음 단단히 먹자. 남든 나가든 우린 한배에 탄 공동운명체다.

지금이야말로 나보다 우리 모두를, 그리고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해야 하는 절박한 시기다.

슬기롭게 차분히 넘자. 흥분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시형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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