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92개사 표본조사] 기업들 기술개발 안간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번 조사 결과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는데도 연구개발 투자는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다는 점이다.

IMF 직후 등 지금까지 경제가 어려워지면 설비나 연구개발 부문을 가리지 않고 투자를 줄여왔던 관행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다.

IMF 직후인 1998년의 경우 전년에 비해 기업들의 전체 연구개발비는 1조1천억원 정도, 매년 1만여명씩 늘어나던 연구인력은 몇백명이 줄었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투자비율도 2.47%에서 2.35%로 떨어졌다.

사실 기업 강제 퇴출이 줄을 잇고 주식시장이 반토막나는 등 좋을 것이 별로 없는 경제 여건을 보면, 기업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느라 내년도 연구개발 투자를 크게 줄일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 응한 92개사 중 투자를 줄이겠다는 기업은 3개사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최소한 올해 수준을 유지하거나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단일기업으로 국내 최대의 연구개발비 투자를 자랑하는 삼성전자는 내년에 올해보다 16.5% 늘어난 2조2천7백여억원을 쏟아붓는다.

삼성은 올해도 당초 투자계획(1조5천8백여억원)보다 22.9% 많은 1조9천4백여억원을 썼다. 연구원도 올해보다 13.4% 늘려 1천4백여명을 새로 채용할 계획이다.

반도체 경기가 불투명하지만 정보통신 기술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구개발 투자를 대폭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엘지화학도 올해 2천억원에서 내년에 2천7백억원으로 35%, 연구인력은 1천5백50명에서 1천6백명으로 10.3% 늘려잡았다.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바이오산업 등 21세기 첨단 산업 분야에 집중 투자할 계획이다.

벤처기업들 역시 코스닥 시장의 침체 등으로 고전하고 있지만 연구개발에 바짝 더 신경을 쓰는 분위기다.

인트라넷을 개발하고 있는 버추얼텍은 올해보다 36% 늘린 30억원을, 인터넷보안업체인 시큐어소프트는 20% 늘린 30억원을 내년에 연구개발비로 쓸 계획이다.

이들 대부분의 중소.벤처기업들은 기술개발에 기업 사활이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기술이 곧 제품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과기부 박영일 국장은 "우리나라 기업들은 미국.일본 등 선진국 정부와 기업들이 경제가 어려울수록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해 활로를 찾았던 것을 봐 오면서도 정책에 반영하지 못했다" 며 "국내 기업들의 연구개발 투자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있는 현상" 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10년째 장기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은 매출액이 줄어도 오히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투자비율을 늘리고 있다.

98년 일본 기업들의 매출액은 6%나 줄었으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비율은 3.87%에서 4.11%로 올랐다.

이같은 연구비 확대는 92년 이후 최고치로, 기술개발로 불황을 뚫어 보려는 일본기업들의 의지로 해석되고 있다.

소니나 마쯔시다 등 일본 굴지의 기업들이 장기불황에도 끄덕없이 버티고 있는 것도 70년대부터 해외에 10여개씩의 연구소를 운영하는 등 연구개발투자를 지속적으로 해온 결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이 90년대부터 사상 유례없는 장기 호황을 누려 오고 있는 것도 80년대에 집중적으로 연구개발에 투자한 덕으로 보고 있다.

과학기술평가원 장문호 원장은 "국내 기업들 역시 지금처럼 연구개발 투자를 늘려 나간다면 수년안에 웬만한 어려움도 뚫고 나갈 수 있는 체질로 바뀔 것" 라고 평가했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는 연구개발비의 편중현상이 여전하다는 점도 나타났다.

92개사 전체의 내년도 연구비 중 삼성전자의 비중이 38%나 되며, 1천억원을 넘는 기업이 6개사에 불과했다.

이들 6개사의 비중은 전체의 82%였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나눠보면 대기업이 전체의 98%나 됐다.

업종별로는 전기.전자가 전체의 80.4%, 기계.금속이 9.9%, 화학.섬유가 9.5%로 나눠져 있다. 전기.전자가 우리나라 산업에서 기둥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방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