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이 좋다] "아스라한 금호강 옛 풍경 나를 붙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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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드넓던 황금 들판이 도로.공단과 아파트 단지로 변하고, 금호강.낙동강.신천 주변의 우람한 버드나무와 유난히 깨끗하고 넓은 모래.자갈밭이 콘크리트로 덮히는 꼴이 보기싫어 가끔씩 대구를 떠나고 싶은 때가 있다.

하지만 막상 누가 "떠나라" 고 명령한다면 못 떠날 것 같다. 기억속에 깊게 남아 있는 성장기의 옛 모습 때문이다. 사라진 옛 풍경은 세월이 갈수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각인되는 모양이다.

나는 바람에 설렁이는 갈대소리가 비파소리 같다해서 이름 붙여진 금호강과 넓다란 들을 앞두고 산기슭에 자리잡은 농촌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당시 내 고향 금호강엔 소달구지가 겨우 지나 다닐 수 있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서 멋지게 다이빙하는게 그 시절 나의 가장 큰 바람이었다.

물장구치다 지치면 제방에 누워 강줄기 따라 저 멀리 지는 해와 노을을 보며 감동하기도 했었고, 수확기 때면 친구네 농삿일을 거든답시고 탈곡기를 열심히 밟기도 했다.

기차통학을 하던 중학교 때는 금호강을 따라 놓여진 철길을 오가며 생동하는 강의 모습에 감탄하곤 했다.

등.하교길 하양초등학교의 벚꽃나무 울타리와 솔밭, 아담한 하양역 건물과 그 앞에 길따라 늘어선 우람한 플라타너스, 대구역에서 내려 동성로를 지나 왼쪽으로 모퉁이를 돌면 주택가 한 집에서 늘 흘러나오던 바이올린 소리….

대학 시절의 기억은 2층짜리 나지막한 학교건물과 가을이면 건물 앞에 흐드러지게 피던 코스모스, 그리고 봄이면 학교 주변을 새파랗게 뒤덮었던 보리밭이 주는 정겨움 등등이다. 하지만 지금 대구나 하양 어느 곳에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옛 모습은 흔적조차 없다.

하양의 과수원 오솔길도, 신천이 금호강과 합쳐지는 무태동의 절경도, 금호강변 밤나무숲도, 서대구 낙동강 습지의 드넓은 모래밭.버스나무 숲.경작지도 모두다 사라졌다. 그 곳에 월동하던 수많은 두루미.황새.백조.오리도 사라지고 없다.

팔공산의 자연스런 자태도 포장도로.위락시설.골프장으로 절단나 버렸고, 고풍스럽던 동화사마저 화강암으로 도배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구를 떠나기가 주저스럽다. 때가 되면 현명한 대구 시민들이 잃어버린 이 모든 것을 찾고자 힘을 모을 것이란 믿음때문이다. 옛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란 '희망' 의 땅. 그래서 난 대구가 좋다.

유승원 <영남자연생태보존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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