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르포] 선관위, 광장서 공개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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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4일 오후4시 플로리다주 웨스트 팜비치 재해대책본부 앞 광장. 고어와 부시 지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팜비치 선관위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들과 마주앉아 있다.

피켓을 든 양쪽의 지지자들은 기회만 생기면 자신들의 주장을 언론에 알리기 위해 좁은 틈을 비집고 다니느라 북새통을 이뤘다.

안건은 '14일 오후 5시까지 개표 결과를 제출하라는 주정부의 방침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팜비치만의 독자적인 수작업 재검표에 들어갈 것이냐' 다.

얼핏 보기엔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팜비치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미국 대선 결과는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이곳에서 손으로 일일이 재검표를 하면 고어가 적어도 수백표는 더 얻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선관위원들의 표정도 한결같이 무겁다.

"주 당국이 요구한 선거법을 안 지키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 그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 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자 3명의 선관위원 중 가장 나이?많은 캐럴 로버츠 위원은 "팜비치 유권자들의 진정한 의사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만일 그걸 확인하는 게 불법이어서 감옥에 가야 한다면 나는 가겠다" 고 단호하게 말했다.

할머니 선관위원의 그런 오기에 민주당 지지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러자 판사인 찰스 버튼 위원장은 "지금 여기는 정치집회장이 아니다. 계속 소란스러우면 안으로 들어가 비공개로 회의를 하겠다" 고 엄포를 놨다.

군중들은 그 한마디에 숨을 죽인 채 회의 내용을 계속 지켜봤다. 회의는 하루종일 계속돼 결국 재개표 결과를 플로리다 내무장관에게 통보해야 할 시간을 1시간 남긴 오후 4시가 됐다.

위원들은 결국 중간을 선택했다. 주 정부당국이 요구한대로 개표 결과는 14일 오후 5시까지 통보하되 팜비치 스스로 독자적인 수작업 재검표를 병행한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이 당장에라도 싸움을 벌일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일단 팜비치 선관위가 결정을 내리자 아무도 이에 이의를 달지 못했다.

선관위원들이 유권자들과 하루종일 토론해가며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애쓰고, 그것이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다는 점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민주당원 레즐린 월러치(68)할머니는 "부시 대통령이 된다면 4년 동안 레임 덕(권력 누수현상)은커녕 데드 덕(권력 불행사현상)일 것" 이라고 쏴붙였다.

그러나 또 다른 공화당원은 "고어는 도대체 언제까지 질질 끌며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거냐" 고 비난했다.

신중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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