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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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23. 바이러스학회 창립

많은 사람들이 유행성 출혈열 연구를 한국인으론 내가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시초는 나의 은사인 서울대의대 미생물학교실 기용숙교수라고 볼 수 있다.

기교수는 1964년 한국군 유행성출혈열 연구반을 조직해 자문관을 맡았으며 휘하에 양용태대위와 백상호대위가 실무를 담당했다.

65년엔 의사들의 사표로 기억되는 故 장기려박사의 아들이자 현 서울대의대 해부학교실 교수인 장가용소령 등이 맡았으며, 67년엔 최성배대위가 연구를 했다.

68년엔 일본국립보건원 오쿠노박사가 세계보건기구 자문관으로 한국에 파견돼 유행성 출혈열을 연구했다.

내노라하는 서구 과학자들도 한국전쟁 이후 내한해 유행성 출혈열이란 괴질의 원인을 알아내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70년 12월 미육군의 연구비 지원으로 유행성출혈열 연구가 의욕적으로 시작됐지만 나 역시 처음엔 그들과 같이 오리무중 속에 헤매야했다.

72년 들쥐 조직으로부터 이상한 미생물 9개를 돼지 신장세포에서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엔 원인 바이러스를 발견한 것이 아닌지 잠시 흥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출혈열 환자의 혈청과 반응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힘이 빠졌다. 73년 2개의 미확인 바이러스를 또 발견했다.

다행히도 이들중 일부 샘플이 환자의 혈청과 반응했다. 그러나 환자뿐 아니라 정상인의 혈청과도 반응하는 것이 아닌가.

원인 바이러스라면 당연히 출혈열 환자에서 선택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알고 봤더니 이 미지의 바이러스는 유행성 출혈열의 원인 바이러스가 아니라 사람과 쥐의 장기에 흔히 감염되어 있는 레오바이러스로 판명됐다.

레오바이러스는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한국인의 경우 정상인이라도 90%에서 항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절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레오바이러스로 밝혀지면서 갑자기 희망이 사라지고 차츰 연구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초조해지는 것은 물론 집에서 신경질을 내는 일도 잦아졌다. 학자는 공명심에 앞서 냉정하게 연구결과를 분석해야 한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 무렵 기억에 남는 일은 바이러스학회를 창설한 일이다. 71년 3월 나는 서울 종로 한일관에서 바이러스학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으로 취임했다.

그 때까지 미생물학회는 의사들이 주축이 된 대한미생물학회와 수의학자나 생물학자 등 비의사 출신이 이에 반발해 만든 한국미생물학회로 양분되어 있었다.

참으로 우스운 것은 똑같은 미생물학회면 미생물학회이지 앞에 '대한' 이니 '한국' 이니 하는 접두사가 따로 붙는 것이었다.

지금도 학회의 이름 앞에 가나다 순으로 볼 때 보다 앞에 위치하는 '대한' 을 '한국' 보다 선호한다고 한다.

대한은 주류학회고 한국은 비주류학회란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게다가 의사와 비의사로 나눠 학문연구보다 권력다툼에 나서는 것은 아무리 봐도 옳지 못한 일이다.

나는 그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바이러스학회에 의사 뿐 아니라 비의사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그 결과 수의사 출신인 김경호씨가 부회장을 역임했다.

당시엔 미생물학회에서 빠져나와 따로 바이러스학회를 결성할 때 선배들로부터 많은 욕을 먹었지만 지금은 미생물학회를 압도할 정도로 많은 회원들이 참여해 열띤 학술토론을 벌일 정도로 성장했다.

학자는 오직 논문으로 말할 뿐이라지 않은가. 의사 면허증이나 출신학교를 갖고 서열 매기기나 편 가리기를 일삼는 구태의연함은 하루 빨리 우리 학계에서 사라져야할 것이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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