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워치] 평화보다 정치생명 우선…바라크 이스라엘 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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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40일 가까이 계속 중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양측이 휴전에 합의했다는 보도가 나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유혈사태가 발생한다.

팔레스타인은 오는 15일 예정대로 독립을 선포할 계획이며, 이에 맞서 이스라엘은 '강제분리' 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봉쇄할 방침이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다.

이번 사태는 지난 9월 28일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리쿠드당 당수가 동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한 것이 발단이다.

샤론의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양측간 충돌을 유발해 평화협정의 진행을 방해하는 한편 자신의 당내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샤론은 베냐민 네타냐후 전 총리가 최근 독직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을 계기로 당권을 넘보는 데 위협을 느끼고 있다.

한편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는 사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다. 아랍권 정상들이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오슬로평화협정 진행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는 '타임아웃' 을 선언했다.

또 팔레스타인의 독립 선포에 대비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를 폐쇄하고 이스라엘 영토와 유대인 정착촌을 직접 잇는 통로를 만들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해 5월 총리 취임 당시 고(故) 이츠하크 라빈 전 총리의 후계자로 평화정착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됐던 바라크로선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바라크의 이같은 변모는 지지세력 대거 이탈이라는 불리한 상황으로 나타났다. 취임 당시 의회 내 전체 1백20석 중 68석을 확보했던 연립여당은 현재 30석에 불과할 정도로 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바라크는 안정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샤론의 리쿠드당과 제휴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평화협정 자체를 부정하는 극우파 정당인 리쿠드당과 손잡는 것은 전체 평화구도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

샤론은 제휴 조건으로 바라크의 노동당과 리쿠드당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것, 자신이 부총리직을 맡을 것, 평화협상에 관한 모든 의제 결정에 자신이 직접 간여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 등 무리한 요구를 내놓고 있다.

이스라엘에선 정치가로 출세하자면 화려한 군경력이 필수적이다. 바라크도 라빈처럼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武功)을 쌓았다. 정치가로 변신해선 라빈의 '땅과 평화의 교환' 정책을 줄곧 지지해 왔다.

이 때문에 라빈 암살 후 네타냐후가 총리로 있으면서 평화협정 진행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바라크가 총리로 취임하자 평화를 바라는 이스라엘 국민의 다수와 아랍권은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는 최악이다. 바라크는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평화를 포기해도 좋다는 생각인 것 같다.

지난 4일은 라빈의 5주기(周忌)였다. 라빈의 죽음이 중동평화에 얼마나 큰 손실이었던 가를 새삼 깨닫는다.

정우량 국제담당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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