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몽헌씨가 나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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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울 계동 현대그룹 사옥 12층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사무실. 지난 주말부터 전화통에 불이 날 정도다.

정부와 채권단 관계자는 물론 계열사 임직원들이 "회장님 어디 계시냐" "언제 귀국하느냐" 라고 묻는 전화가 빗발친다.

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이 지난달 30일 1차 부도를 냈다. 이튿날 가까스로 결제해 부도 위기를 벗어났다.

그러나 회장님은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이런 판에 프로야구 현대 유니콘스는 1일 "정몽헌 구단주가 강명구 구단주 대행과의 국제전화 통화에서 우승하면 선수단과 백두산을 오르기로 약속하고 남은 경기에서 선전을 당부했다" 고 밝혔다.

지난 3월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벌어진 뒤 鄭회장은 걸핏하면 외국에 나갔다. 한번 나가면 보통 열흘도 넘게 머물렀다.

지난 8월에는 자동차 계열분리건을 놓고 당시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이 만나자고 했는데 일본에서 한달 가까이 들어오지 않아 결국 개각할 때까지 그를 만나지 못했다.

鄭회장은 3월부터 지금까지 2백40일 가운데 절반도 넘는 1백30일을 해외에서 보냈다. 현대측은 계열사의 외자유치를 위해 해외 출장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대의 외자유치가 제대로 이뤄졌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오히려 일본의 골프장과 술집에서 여러차례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이 들려온다.

현대의 홈페이지에는 소액주주와 직원의 호소문이 자주 눈에 띈다. 한 투자자는 "현대사태는 최대 위기이자 재도약의 전환점에 서 있다.

鄭씨 부자가 집 한칸, 그랜저 자동차 한대, 회장으로서 앞으로 30년치 봉급을 제외하고 모든 사재를 출연하는 결단을 내려야 산다" 는 글을 올렸다. 한 직원은 "현대 살리기 운동본부를 조직하자" 고 호소했다.

그럼에도 현대는 鄭회장이 3부자 동반퇴진 약속에 따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회사를 전문 경영인에게 맡겼기 때문에 특별히 할 일이 없다고 설명한다.

이를 두고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지난달 31일 "현대가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현 시점에서 鄭회장이 경영에 복귀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몇해 전 임원들이 '회장님, 우리 회장님' 을 연호하면 회장이 손을 비비며 '잘 되겠지' 라고 응답하는 TV 코미디가 있었다. 오늘도 회장님이 없는 현대건설이 과연 잘될까?

김시래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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