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읽기] '낡은 프로' 존재의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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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같은 제목의 프로그램이 반년을 넘기기도 힘든 게 요즘 방송환경이다. 프로그램의 '존재의 이유' 는 오로지 시청률이다. 아까운 전파를 왜 낭비하느냐는 물음에 딱 대꾸할 말이 없다.

하기야 대중가요 가사에도 '사랑' 이 유일한 존재 이유이긴 하다. 시청자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프로그램은 존재할 근거가 없다는 게 제작, 아니 편성 담당자의 명료한 현실인식이다.

살벌하기까지 한 방송풍토에서 10년을 버티기란 녹록한 일이 아니다.

창사 10주년을 맞은 SBS에서 꿋꿋한 생명력을 지닌 프로그램을 꼽는다면 아마도 '그것이 알고 싶다' 일 것이다.

부제가 '미스터리 다큐멘터리' 에서 '문성근의 다큐세상' 으로 바뀌긴 했지만 독특한 진행방식과 성실한 취재내용은 시청자를 꾸준히 사로잡았다.

KBS는 공영방송 명함에 걸맞게 장수 프로그램 목록이 꽤 된다.

'전국노래자랑' '가족오락관' '가요무대' 의 진행자인 송해나 허참.김동건씨는 어느새 가족 같은 친근감으로 시청자에게 다가와 있다.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역시 10년을 넘겼다.

'열린 음악회' '체험 삶의 현장' 'TV는 사랑을 싣고' 도 시청률 추이와 무관하게 여전히 제 모습을 유지한 채 전파를 타고 있는 품목들이다.

이달에 MBC는 스무 해 넘긴 프로그램 두 편을 방송했다. 1980년 10월 21일 첫 방송된 '전원일기' 가 20년을 맞았고 젊은이들의 노래잔치 '대학가요제' 또한 스물네돌을 맞았다.

최불암.김혜자씨를 실제 부부라고 착각하는 시청자가 생길 만도 한 시간의 양이다.

실제 행정구역상 양촌리가 있건 없건 간에 '전원일기' 속의 마을은 한국인의 마음 속에 잃어버린 (돌아가고 싶은)고향으로 자리잡았다.

그곳에 가면 금동이나 복길 할머니도 만나고 인자한 표정의 김회장이 인사를 받아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상이 각박해져 "저런 인심이 어디 있을까" 하며 드라마의 개연성을 문제삼지 말기 바란다. 드라마가 꼭 있음직한 현실만 보여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소중한 가치들, 훈훈한 인간의 냄새를 맡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이유는 충분하다.

'대학가요제' 의 존폐 여부가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며 일말의 비애를 느낀다. 개인적으로 여섯 해 동안 연출을 맡은 '정 때문에' 가 아니다. 아직도 그 무대에는 시대정서와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있다. 객석엔 그들에게 박수치며 열광하는 젊은 또래집단이 있다.

무엇보다 늦은 시간까지 TV를 지켜보며 '그때 나에게도 젊음이란 게 있었지' 하며 '순수의 시대' 를 반추하는 중년의 시선이 있다.

베스트셀러도 나쁘지 않지만 스테디셀러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늘 그 때쯤 그 자리에서 편하게 맞아주는 가족 같은 프로그램을 죽이거나 내쫓지 말기 바란다. 오래된 것이라고 모두 낡은 것은 아니다.

한 가정에 3대가 살면 화목한 그림이 되듯이 신구가 함께 존재하는 균형감 있는 TV가 좋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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