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재판정에 선 박영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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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9면

제8보(77~91)=흑▲의 죽음를 지켜보면서 바둑 한 판에도 운명이 존재함을 느낀다. 기세 좋게 다가갔으나 너무 강했던 흑▲-이 수를 놓고 박영훈 9단은 후회를 거듭했고 그 수를 어떻게든 합리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빗나간 정열의 화신이었던 흑▲는 지금 가만히 앉은 채 죽음을 맞고 있다. 77과 79라는 필연의 수순들 속에서 흑▲의 생명은 저절로 꺼지고 있다.

박영훈은 81, 83으로 지켜놓고 하회를 기다린다. 사실은 재판정에 나간 피고인의 심정이다. 상대는 어느 정도 들어올지 생각 중이다. 선악을 떠나 딱 이길 만큼 들어올 것이다. 그저 판결을 기다릴 뿐이다. 쿵제 9단은 88로 왔다. 이 정도면 이긴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그렇다면 흑의 대응책은 물어볼 것도 없다. 하지만 박영훈은 89로 붙여 집 짓기를 선택했고 검토실의 기사들은 “그걸로 계가가 되나” 하고 서로에게 묻고 있다.

국후 박영훈 9단은 89, 91처럼 최대한 지어 계가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그게 오판이었다고 자백(?)했다. ‘참고도’ 흑1로 공격하는 길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참고도’는 백2로 들어와도 잡기 어렵고 백은 여전히 A, B 등의 출구가 보장돼 있다. 이건 더 힘들다고 본 것인데 그래도 이게 상대에겐 가장 두려운 길이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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