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입구론과 출구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일본 매스컴에서 자주 쓰는 용어로 '입구론(入口論)' '출구론(出口論)' 이라는 말이 있다. 이해가 엇갈리는 현안을 처리할 때 서로의 기본입장과 전제조건부터 정리.해결한 후 행동에 들어가자는 주장이 입구론이다.

반대로 출구론은 일단 행동에 돌입한 후 차차 걸림돌을 제거해 출구를 찾아보자는 견해다.

상대방에 대한 철저한 사전검증을 거쳐야만 결혼할 수 있다는 시각과 먼저 결혼식부터 올리고 살다보면 친숙해 진다는 시각에 각각 비유할 수 있다. 입구론은 원칙론, 출구론은 현실론에 가깝다.

골란고원을 반환한다고 약속해야만 협상에 응하겠다는 시리아와 안전보장조치를 먼저 내놓으라는 이스라엘은 피차 입구론으로 맞서 있는 셈이다.

평화적 통일을 이뤘지만 결국 전쟁-흡수통일로 결말 난 남북예멘은 출구론의 실패사례다. 러시아에 북방4도(쿠릴열도 남단 4개 섬) 반환을 끈질기게 요구 중인 일본 내에도 입구론과 출구론이 대립해 있다.

반환을 전제조건으로 삼는 쪽과 현실적으로 조속한 반환이 힘든 만큼 섬 주변을 러시아와 공동개발하는 등 '분위기' 부터 조성하자는 쪽이다.

북한과의 수교문제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의혹.미사일문제.요도호 납치범 송환 등은 일본측 수교협상 '입구' 에 놓인 전제들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최근 들어 출구론을 대폭 수용해 북한과 본격적인 수교협상을 벌이고 있다. 북한과 미국이 지난 6일 공동성명 형태로 '테러반대' 를 천명한 것은 서로 입구론에서 조금씩 물러선 절묘한 타협이었다.

북한은 과거의 테러를 시인하지 않음으로써 체면을 살렸고 미국도 반(反)테러 원칙을 고수했다.

한국의 요즘 대북정책은 전형적인 출구론에 해당한다. 일단 주고 나서 나중에 받을 것을 받아내자는 방안이다.

그러나 출구론은 대개 핵심문제를 뒤로 미루거나 우회하기 때문에 나중에 일이 복잡해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정부는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나 아웅산사건 같은 대형 테러사건도 출구론으로 해결하자는 자세인 것 같다.

통일론에 이르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북한이 주장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와 우리의 '연합제' 를 명확히 정리하지 않고 '일단 받아들이고 보자' 는 출구론에 따를 경우 엄청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어디가 입구이고 출구인지 투명하게 가릴 필요가 있다.

노재현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