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은행문도 닫는다는 각오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기업은 과감히 퇴출시키겠다는 내용의 2차 기업.금융 구조조정 계획이 발표됐다.

공적자금 조성을 바탕으로 기업.금융 개혁을 연내 마무리하겠다는 게 정부 복안이다. 옥석(玉石) 안가리고 모든 부실기업을 껴안고 가겠다는 발상이 구조조정에 대한 정부 의지를 의심케 하고 국내외의 불신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됐던 점을 감안할 때 옳은 궤도수정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그것도 이번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해야 한다. 우선 퇴출기업 선정에 대해 투명하고도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정부 개입은 옳지 않다. 하지만 도덕적 해이가 판을 치고 은행더러 스스로 목줄 죄는 일을 하라고 맡길 수도 없는 현실을 감안, '부실' 에 대한 큰 기준은 정부가 제시할 수밖에 없다.

대신 구체적인 사안은 은행 재량에 맡기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철저한 감시.감독이 따라야 한다. 지난번 한 건설회사의 경우처럼 정치적 고려에 따라 무리하게 지원 대상이 되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

이왕 '살생부(殺生簿)' 를 만들기로 한 만큼 서두르는 게 좋다. 아니면 온갖 루머가 판을 치면서 자칫 멀쩡한 곳까지 골병드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은행에 대한 대응이 너무 소극적인 것도 문제다. 지금까지 금융개혁에 1백조원 이상 들어갔지만 금융시스템은 여전히 엉망이다.

대우 탓만도 아니다. 한빛은행 같이 엉뚱한 데에 수백억원씩 낭비하는 일들이 여전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공적자금을 수십조원 더 넣는다고, 또 기업만 죈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차제에 '부실징후 은행' 을 선정, 속사정을 속속들이 파헤쳐 가망 없는 곳은 과감히 퇴출시킨다는 각오로 금융 구조조정에 임해야 한다. 또 행장 등 최고 경영진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부가 핵심인 노사(勞使)문제를 간과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려면 조직.인력 정리와 조직원들의 반발은 필연적인 수순이다.

정부가 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의지가 있는지, 또 근로자들을 설득하고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어떤 복안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까지의 예에서 보듯 노사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개혁은 허사가 된다. 또 이번 개혁까지 '부실화' 하면 우리 경제는 정말 희망이 없게 된다는 점을 정부나 금융권.기업.근로자들이 명심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 특히 경제장관들은 말을 자제하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구조조정이 시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처럼 '연내' 로 자꾸 시한을 못박는 것도 무리다.

시장 안정을 위해 정부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것은 물론 다시 불신을 낳는 요인이 된다. 백마디 말보다 원칙에 따른 투명하고도 객관적인 집행이 국민 신뢰를 얻는 첩경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