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너무 긴 의료파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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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에서 군정을 실시하던 미 점령군이 1947년 일본 의료.약업계를 시찰한 뒤 작성한 보고서에 '일본에서는 의사가 약을 팔고 치과의사가 금을 파는가 하면 약사는 약국에서 잡화(雜貨)까지 취급하고 있다' 는 대목이 들어 있다.

'진료는 의사, 약은 약사' 가 상식이던 서양인으로서 일본의 관행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19세기 말 독일인의 도움으로 근대적 의료제도를 도입한 일본정부도 의사(한의사)가 진료와 함께 약도 취급하고 이익을 얻어 온 오랜 전통마저 깨지는 못했다.

당연히 약사들은 반발했고 정치가.관료.일반국민까지 의.약 논쟁에 휘말려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의약분업 투쟁' 의 와중에 일부 의사가 환자를 가장하고 약국에 들어가 위법행동을 유도했다가 서로 소송을 거는 사태도 벌어졌다.

젊은 약사들은 '청년행동대' 라는 것을 조직해 연좌농성으로 날을 지샜고, 병원 앞에 분뇨를 뿌린 약사도 있었다.

일본이 법적으로는 강제분업 형태를 띠고 있으나 실제로는 임의분업인 것은 이런 갈등이 채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파업 같은 물리적 행동은 없어진 지 오래다.

현재 일본은 의사의 직접조제 허용 범위가 매우 넓고, 환자가 원외(院外)처방전을 요구하지 않을 경우에도 의사의 조제가 허용된다.

대신 병원 내 약국은 약간 값이 비싸기 때문에 환자는 가격 차이와 불편도를 감안해 원내.외 약국 중 한쪽을 선택한다고 한다.

지난해 현재 일본의 의약분업률은 약 30%. 그러나 임의분업은 의약분업의 '원칙' 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 의료계 내에서 반론이 만만치 않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본지 창간기념 인터뷰에서 의료계 파행에 대해 "우리도 조금 안이한 판단을 한 것이 아니냐는 반성을 하고 있다" 고 털어놓았다.

"의사.약사측과 시민단체가 합의해 '그렇게 해달라' 고 해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한 데서 조금 안이한 판단이 나왔다" 는 설명이다.

문제는 앞으로의 대책이다. 분업을 연기하자니 사실상의 '취소선언' 으로 받아들여질 테고, 어정쩡한 임의분업도 어렵고, 현행 제도를 강행하면 파행이 계속될테니 딱한 노릇이다.

요즘 분노할 힘조차 없는 암환자 중 일부는 집까지 팔아 미국 내 병원으로 떠나고 있다. 대통령이 잘못을 인정했다면 의사들도 너무 오랜 파업에 대해 '반성' 부터 해야하지 않을까.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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