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페루 후지모리 10년 천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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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의 10년 천하가 막을 내릴 것 같다.

'동양의 경제 기적을 남미에 실현시킬 인물' 이란 찬사를 받으며 그가 일본계 최초로 페루 대통령에 당선됐던 게 1990년이었다. 그러던 그가 지금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한몸에 받고 있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토요일인 16일 밤 갑자기 TV 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먼저 "국가정보부 활동을 중지시키겠다" 고 말했다.

자신의 심복인 몬테시노스 국가정보부 최고 책임자가 야당 의원을 여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돈봉투를 건넨 장면이 폭로된 데 따른 조치다. 그는 매수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당국에 지시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폭탄선언은 그 다음에 나왔다. 후지모리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새 선거를 실시하겠으며 이 선거에 나는 나서지 않겠다" 고 말했다.

정치 분석가들은 후지모리의 이번 선언을 '여기저기서 물이새던 둑이 결국 무너진 것' 이라고 평가한다.

집권 초기 페루 국민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후지모리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부를 봉쇄했는가 하면 자신의 3선을 합법화하는등 독재자로 변신, 민심이 이반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대선 때 후지모리는 엄청난 자금 살포에도 불구하고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대신 야당 후보인 알레한드로 톨레도가 40%를 득표, 정권의 종말을 예고했었다.

후지모리는 가까스로 당선된 뒤 국제사회의 비난과 국내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나름대로 유화정책을 펼쳤다.

야당 인사를 총리에 임명하고 민주화 일정 등에 합의하는 등 성의를 표시한 것이다. 그러던 마당에 야당 의원을 매수한 사실이 뒤늦게 폭로돼 어처구니 없이 무너진 것이다.

후지모리의 운명은 이제 풍전등화다. 정권교체가 될 경우 장래에 대한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지모리는 가급적 선거일정을 뒤로 늦추면서 퇴임후를 대비할 가능성이 크다.

또 자신의 후계자가 반드시 당선되게 하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같은 과정 전부가 또다시 야당들엔 새로운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이래저래 페루의 향후 정치일정은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종혁 기자

[페루 후지모리 일지]

▶1990년 7월=대통령 취임

▶92년 4월=친위 쿠데타로 의회 해산 및 사법부 봉쇄

▶93년 12월=대통령 연임 보장하는 새 헌법 제정

▶95년 7월=대통령 재선 성공

▶99년 12월=야당 반대 속에 3선 출마 선언

▶ 2000년 4월 9일=대선 1차 투표에서 과반수 확보 실패

▶5월 28일=야당 후보 불참 속 결선 투표로 3선 성공

▶7월 28일=대통령 취임식

▶10월 14일정보책임자의 야당 의원 매수공작 폭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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