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하재봉 '안개와 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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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 뼘 내 가슴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산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매일 매일

해질녘의 가지 끝에서 따먹는 태양이

하나의 씨앗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리하여 아침마다 피어오르는 꽃의 이마에

핏발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으므로,

물의 전설을 믿고 골짜기 낮은 곳에 모여

보이지 않는 숲을 이루고 있는 그대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내 지나가는 걸음 뒤로 쌓이는

저 어두운 산맥 속에 어떻게

쉬임없이 불의 씨앗이 심어지는지

- 하재봉(43) '안개와 불' 중

시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을 몇개쯤은 묻어두고 산다. 살면서 부딪치는 사랑.미움.기쁨.슬픔.노여움.., 그러나 하재봉은 날마다 태양을 혼자 따먹고 씨를 남기지 않았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화산이 있는 것을 모를거라고 믿고 있다. 하긴, 누가 남의 몸속의 불길을 보려하겠는가. 내 안의 끓는 용암을 누르기도 숨가쁜 것을.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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