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남아공 다이아몬드왕 해리 오펜하이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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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난 19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병원에서 91세를 일기로 별세한 다이아몬드 회사 드비어스의 전 회장 해리 오펜하이머(Harry Oppenheimer)는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는 슬로건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전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드비어스와 앵글로 아메리카를 사반세기 동안 이끌어 온 오펜하이머는 남아공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가였던 동시에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반기를 들어온 인본주의자로 온 국민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왔다.

하지만 흑인 노동력 착취를 통한 대규모 광산 개발의 총책임자이자 인종차별정책을 고수하는 남아공 정부의 최대 경제적 파트너라는 그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인종차별정책은 분명 잘못된 것" 이라는 그의 개인적 신념이 크게 부각되지는 못했다.

비록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리긴 했지만 이것이 되레 진정 그가 외치고자 했던 양심의 소리에 평생의 족쇄로 남았던 것이다.

1909년 남아공 킴벌리 광산촌에서 태어난 그는 31년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뒤 귀국, 당시 앵글로 아메리카를 운영하던 아버지 어니스트 오펜하이머 곁에서 일을 배우다 48년 자신의 고향인 킴벌리 지역 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그는 집권당인 연합당내 자유주의 진영에 가담, 흑인과 유색인종에게 의석을 만들어 주기 위한 모임을 이끌었다.

특히 82년에는 흑인은 제외하고 유색인종에 한해서만 투표권을 확대하자는 법안에 강력히 반대하는 야당을 지지하기도 했다.

야당이었던 민주당 지도자 토니 레온은 "오펜하이머는 지적이고 대단한 인간적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며 "특히 관대한 박애주의자이자 처음으로 반(反)인종차별주의에 앞장섰던 자유주의자" 라고 회고했다.

57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의원직을 사임한 그는 앵글로 아메리카와 드비어스의 경영을 이어받은 뒤 특유의 사업수완으로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해 나갔다.

아프리카 국가의회 대변인 나트 세라체가 "우리는 오펜하이머가 남아공 경제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남아공 주민들은 물론 수많은 이웃나라 국민에게까지 고용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 이라고 말한 것처럼 오펜하이머는 남아공 경제부흥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82년 앵글로 아메리카 회장직을 그만둔 그는 2년 뒤 드비어스 회장에서도 물러나 일선 경영에서 손을 뗐다.

이후 케이프타운대 명예총장을 역임한 뒤 흑인들을 위한 주택.교육사업을 담당하는 도시재단 이사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또 흑인 교육을 전담하는 오펜하이머 재단도 설립했다.

아내 브리지트와 딸 메리, 그리고 드비어스와 앵글로 골드의 사장인 아들 니컬러스를 유족으로 남긴 그는 인종차별정책이 지배하던 남아공의 부유한 백인으로서 흔치 않은 삶을 산 것이다.

비록 그의 신념대로 체제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아프리카 흑인을 위한 그의 노력은 '인간의 존엄성은 영원하다' 는 슬로건과 함께 양식있는 기업인상(像)으로 영원히 남아있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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