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륨을 낮춰요] 퓨전 음악 전성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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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퓨전(fusion; 융합)' 이라는 용어는 이미 새삼스럽지 않다.

퓨전 재즈나 퓨전 아트 등 음악과 미술 분야에 한정해서 사용되던 이 말은 이제 이 시대의 문화와 생활 패턴의 한 면모를 드러내는 말로 자리하고 있다.

퓨전의 유행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지는 것은 당연하다. 완전히 이질적인 여러 요소들 간의 결합이 불러일으키는 상승효과(synergy)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태양 아래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세상이지만, 온갖 유행과 강한 자극에 길들어 있고 기존의 것에 식상해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쉽게 반응한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새로운 것은 무한한 재화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퓨전' 이야말로 엄청난 시장성을 지니는 개념이요 방법론이다.

황토를 바닥에 깐 첨단 아파트의 인기라든지 신드롬으로까지 불렸던 영화 '매트릭스' 의 성공 등과 같은 예는 헤아릴 수 없다.

음악에 있어서 퓨전 또는 크로스오버(crossover)의 경향은 더욱 명백하다.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전통이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듯, 음악에서의 장르 구분 역시 무의미하게 되었다.

기존 장르들의 주요 요소는 서로 혼합되고 차용되어 새로운 소리로 재탄생한다. 이제 중요한 건 누구의 음악이냐가 아니라 어떤 음악이냐이다.

록.재즈.클래식.포크 등 특정 장르의 음악과 개별 아티스트 앨범의 판매고가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는 대신, 그러한 요소들을 뭉뚱그려 뒤섞은 퓨전.크로스오버 성향의 음악과 감각적인 리믹스 앨범이 많이 팔리고 있다는 사실은 음악계가 처한 현실을 잘 드러내 준다.

많은 음악가들은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음악과 같이 그 동안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로 눈을 돌리거나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벽을 허무는 등의 시도를 하게 되었다.

안드레아 보첼리와 사라 브라이트만.바네사 메이.리키 마틴 등 대중적인 성공을 기록한 몇몇 아티스트들의 전례는 퓨전음악의 폭발적인 유행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 음악들이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하고 카타르시스를 전해준다면 그건 더할 수 없이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때론 그 무절제함 탓에 이러한 퓨전의 경향들이 썩 못마땅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무조건적인 혼합만이 퓨전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이 과하면 '혼돈' (confusion)에 다름 아니게 된다.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괴물의 모습처럼 말이다.

김경진 대중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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