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이산상봉] 계관시인 오영재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북측 상봉단의 남한 방문 이틀째인 16일 오전 10시40분. 개별상봉 시간을 맞아 북한 '계관시인' 인 오영재(吳映在.64)씨와 남쪽의 네형제 및 삼촌은 숙소인 서울 워커힐호텔 16층 방에 다시 모여 앉았다.

혈육의 정이란 50년이란 시간도 단숨에 뛰어넘었던 걸까. 다시 만난 지 하루밖에 안됐지만 吳씨 형제는 한집에 살던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대면했다.

"하룻밤 자고 나니까 더 젊어진 것 같군."

吳시인이 먼저 말을 건네자 동생 근재씨가 "어제 간단히 회포를 풀었으니 오늘은 원초적으로 회포를 풀어보자구" 하며 화답했다. 어딘지 모르게 긴장됐던 마음이 일순간에 풀렸다.

그렇게 10분이 지날쯤 吳시인은 얘기를 멈추고 무거운 얼굴로 원고지 뭉치를 꺼내 창가에 세워둔 어머니 영정 앞에 올려놓았다.

그가 어머니를 그리며 적어둔 일곱편의 시(詩)였다.

吳시인은 임시 제사상 앞에서 크리스털잔에 술을 따른 뒤 절을 꾸벅 올렸다. 이 잔은 '김정일 장군' 이 환갑선물로 준 것이다.

"어머니, 오늘이 제삿날은 아니지만 언제 형님.아우들과 어머님을 모실지 몰라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금세 눈이 붉어진 그는 어금니를 물고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들은 5년 전부터 지어온 '무정' '사랑' '슬픔' 등 세 편의 시를 읽어 내려갔다.

"가셨단 말입니까. 정녕 가셨단 말입니까. … 꼭 살아 있겠다고 하셨는데…. 아, 약속도 믿음도 세월을 이겨낼 수 없었단 말입니까…. "

순간 형제들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취재진도 숨을 멈추고 吳시인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50년 세월의 한이 목메게 해선지 낭독을 잠시 멈췄다.형제들도 숨죽이며 눈물을 흘릴 뿐 우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무정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가슴 속으로만 목놓아 부르던 시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는 어머니 사진 앞에 무릎 꿇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형제들도 吳시인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아버지.어머니 고향이 있는 남녘 땅에 발을 들여놓으며 이 둘째아들이 명복을 빌고자 절을 드리러 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살았다는 것을 알고 저를 만나기 전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왜 먼저 세상을 뜨셨단 말입니까."

15세이던 1950년 전남 강진에서 인민군에 입대해 북으로 넘어간 뒤 한번도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 였다.

吳시인의 50년을 기다린 사모곡(思母曲)은 시 낭독을 마친 뒤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吳시인은 김일성(金日成)주석으로부터 최초로 계관시인 칭호를 받은 북한의 대표적 문인이다.

전진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