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지상감상] 3. TV 정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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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백남준이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은 그야말로 '앞뜰과 뒷동산'이 있는 큰 집이었다.

대문도 커서 동네에서는 그 집을 '큰 대문집'이라고 불렀다. 큰 대문집에는 넓은 앞뜰에 나무들 사이사이에 돌들이 놓인 정원이 있었다.

잘 가꿔진 정원이 있는 뜰에서 백남준은 동갑내기 외사촌 옥희라는 애와 소꼽놀이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며 놀았다.

나도 그때 자주 놀러갔기 때문에 그 정원 뜰에서 셋이 함께 놀곤 하였다.

얼마전, 어른이 된 옥희라는 여인을 만났더니 "남준이의'TV 정원'을 보니까 어렸을 때 자기집에 있던 정원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백남준의 작품에는 어려서 경험했던 일들을 소재로 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TV 정원' 은 원래 1974년에 제작된 것인데 1982년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고 금년 2월에 구겐하임미술관의 '백남준의 세계' 에서 가장 멋있는 '정원' 으로 만들어 관객들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뉴욕타임즈의 미술담당기자 그레이스 그루크는 구겐하임 'TV 정원' 을 보고 가장 야심적인 현대판 작품이었다며, "무성한 푸른 나무들이 퍼져서 회랑(回廊)의 가장자리에 처져있는 분위기가 흥미롭게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구겐하임을 위해 그린 원래의 그림 특징과 같다" 고 평했다.

미술평론가들은 'TV 정원'을 자연과 전자기계의 융합 또는 옥외와 옥내의 결합이란 해석으로 이 작품에 경의를 보낸다.

살아있는 나무와 흙, 이같은 자연에다 쓰지 못하게 되면 내다버리는데도 두통꺼리인 그 딱딱하고 투박한 괴물상자를 어우러트려서 옥외이건 건물안에서건 황홀한 정원을 꾸밀 수 있다는 백남준의 기상천외한 생각을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원에서 아무렇게나 뉘어져서 영상을 내보내고 있는 많은 TV 모니터들이 나무들속에 놓여진 잘 생긴 정원석으로만 느껴지는 것은 어렸을 적의 백남준집에서 보던 정원을 생각해서일까. 그 정원석에서 꽃이 피고, 나비와 벌들이 날고, 그리고 요정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느낌이 든다.

TV 모니터에서 영상으로 나오고 있는 '글로벌 그루브' (Global Groove)속에는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재미나는 일들이 다 합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할 수있는지 모른다.

백남준의 'TV 정원' 을 보고 있으면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좋아하는 어린애가 된다.

전시는 10월 29일까지 호암.로댕갤러리.

이경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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