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개판' 속의 서영훈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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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며칠전 신문에 실린 알프스산에서의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여느 때와 달리 병들고 지친 보통 노인의 모습이어서 안타까웠다.

온화하고 푸근하던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수고하고 짐진 자들을 감싸 안기라도 하듯 표정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던 넉넉함. 그래서 종교와 상관없이 TV나 사진 속에서 그를 만날 땐 늘 유쾌했다. 그 평화로움은 어디두고 초점 잃은 눈망울로 힘겹게 의자에 앉아 있다니, 마음이 저려왔다.

***현실정치 맞서 고군분투

요즘 민주당 서영훈(徐英勳) 대표의 행보에서도 비슷한 심사를 느낀다. 약발이 도통 먹혀 들지 않는 정국 처방전을 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꼭 그렇다.

4월 총선 지원유세를 다닐 때만 해도 그에게선 깨끗하면서도 덕망 있는 이미지가 풀풀 풍겼다. 교황의 경지에 견줄 수는 없겠지만 오랫 동안 시민운동을 펼쳐 온 도덕성과 순수함, 그리고 열정이 돋보였다.

그러나 16대 국회가 개원되면서 두달여 동안 그는 완전히 지친 모습으로 바뀌었다. TV에 비친 그의 얼굴엔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누가 저 양반을 저토록 피곤하게 만들었을까.

각종 정국현안에 대해 그가 제시하는 해법들은 꽤나 그럴싸했다. 보통의 상식이라면 그의 해법에 따라 술술 풀려야 맞다. 날치기 이후 徐대표가 내놓은 카드만 해도 그렇다.

날치기로 만신창이가 된 국회법 개정안과 다른 민생법안을 분리해 다루자고 했고, 문제의 교섭단체 구성요건은 운영위에서 다시 다루되 타협안으로 17~18석으로 재조정하자고 했다.

여야가 한발씩 양보하는 선에서의 현실적 대안이다. 그러나 야당측은 아예 대꾸조차 않는다. 더욱 답답한 노릇은 집안 민주당에서 조차 '당론이 아니다' 며 묵살되기 일쑤다. 최고위원을 뽑는 전당대회가 가까워지면서 그는 아예 찬밥 신세다.

73세의 나이에 뭐 하러 '개판' 정치판에 뛰어들어 평생 쌓아온 깨끗한 이미지에 진흙탕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지. 시민운동가로 남아 있었더라면 훨씬 어울리는 활동을 하며, 사회원로로서 각계의 존경을 받고 있을 텐데, 참으로 딱하고 안쓰럽다.

그가 밝힌 늦깎이 정치 입문 배경은 '곤경에 처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도와주기 위해서' 다. "金대통령이 지난 2년 동안 많은 것을 이루고도 국민으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대표 제의가 들어와 거절하지 못했다" 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총선용 얼굴마담' 이라며, 그의 때묻지 않은 면모를 선거에 활용한 뒤 퇴진시키는 '1회용 투수' 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아까운 양반 버리네" 하고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徐대표는 "나는 다른 대표들과는 다를 것이다. 할 말은 하겠다" 고 기염을 토했다.

"정치문화를 개혁하기 위해 정당에 뛰어들었다" 면서 ▶당내 민주화▶저비용.고효율의 정치문화▶여야 상생정치를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정계진출 목적이 대권같은 개인 욕심차원은 아니라고 본다. 그의 말대로 한 몸 정치개혁에 바쳐 金대통령의 개혁정치를 돕겠다는 순수한 뜻이었다고 보여진다. 그가 표방한 정치개혁의 내용은 386 의원들의 초반 다짐과 다르지 않다. 386 의원들에게 걸었던 국민기대도 그런 내용이었다.

***初心 살려 할말은 하길

그때문에 徐대표의 지친 모습이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상식과 통하고, 국민적 요청과도 일치하는 서영훈의 새 정치 실험. 그게 현실정치의 두터운 벽앞에 좌절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徐대표의 무기력함에 화가 나고, 국민의 뜻은 아랑곳 않은 채 욕심과 술수로 똘똘 뭉쳐있는 현실정치판의 완강함이 밉다.

어쩌면 徐대표는 1~2년 더 대표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차기 대권후보의 조기가시화를 원치 않는 게 집권층의 의중이라면 徐대표 체제는 그에 딱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회의나 주재하는 지금처럼 힘없는 대표다.

徐대표에게 권하고 싶다. 그러한 자리라면 앉아있을 이유가 없다. 하루를 하더라도 초심으로 돌아가 '할말을 하는' 대표다운 대표역할을 해달라는 것이다. 기껏 '개판정치' 라는 한탄만 기억된다면 창피한 노릇이다.

본인이 그렇게 외치던 정치개혁을 위해 마지막으로 화끈하게 매달려보고 그게 안통하면 깨끗하게 손을 털라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주문이 아닐까.

허남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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